장순직 목사(원주 드림교회)

참된 개혁은 ‘영원한 진리’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요절: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 장순직 목사(원주 드림교회)

결론부터 말하자면 종교개혁의 진정한 뜻은 예수 그리스도에 귀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개혁은 근본이 되시고 영원한 진리 되신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며, 그 일은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현대는 오직 과학적 사고방식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진리를 규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말하는 진리란 가변적입니다. 이를테면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는 그것이 진리였으며 과학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더 이상 천동설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주장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상대성 원리로 유명한 아인슈타인도 “나의 학설이 진리는 아닙니다. 누군가 이 이론을 뒤집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은 여전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말씀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진리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신을 나타낸 진리 자체이십니다. 곧 그 진리만 길이 됩니다. 모든 종교는 사람들이 당면한 문제에서 벗어나 보고자 스스로 발생시켜 만든 것입니다. 종교가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서 신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반대로 기독교는 하늘의 계시로부터 시작된 선물입니다.

어느 날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미문이라는 곳에 앉아 구걸하는 이를 만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그 사람을 향해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킬 때 바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보고 놀라서 솔로몬 행각에 모여들자 베드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성들에게 예수를 전파합니다. 하지만 제사장들과 사두개인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가, 이튿날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 세워 놓고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고 심문을 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관원과 장로들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4장 10절에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이름은 탄생 전에 이미 주의 사자를 통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고 말씀에 계시된 이름 예수(Jesus)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메시야(Messiah)와 같은 말입니다(요 1:41).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역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름인 것입니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삼위 중 제2위 되신 성자 하나님이시며, 성부 하나님과 완전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는 메시야이시므로 하나님의 후사와 대표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초자연적인 출생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호칭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구원주는 등식관계가 성립됩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고 했습니다. 변화산에서 천상의 광경을 본 베드로에게도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 17:5)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베드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건축자들이 쓸데없다고 버린 돌과 같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와 지위를 가지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받으시며, 만민을 구원하시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사망이란 인간의 모든 죄악이 총괄적으로 뭉쳐진 단어입니다. 그 의미가 육체적이며 세속적인 것이든, 영적이며 영원한 것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바로 인간이 구원의 대상인 것을 전제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 불가결한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사람에게 고통과 질병과 사망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며, 따라서 전 인류는 구원의 필연적인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예수 이름 외에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뜻하는 헬라어 ‘소테리아’라는 단어는 단순히 날 때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산헤드린 면전에 외친 선언은 ‘오직 예수로만 구원’입니다. 다른 곳에나 다른 이름의 가능성은 0.01%도 없습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us)’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고백과 신앙은 개혁교회의 기본사상입니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뿐이며,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의 이름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예수의 이름에 담긴 권세와 능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지금도 산헤드린 공회처럼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만은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단은 슬그머니 예수의 이름을 생략하게 만들고, 대신 인간의 이름을 자랑하라고 충동합니다. 자기의 능력, 자기의 지식, 자기의 외모, 자기의 소유를 의지하고 자랑하도록 부추깁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나선 목적은 황금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어느 날 자신의 마음이 온통 황금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던 순간, 콜럼버스는 눈물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립니다. ‘이제부터 이름에 걸맞는 인생을 살자.’
그때부터 콜럼버스에게 가치관의 변화와, 인생의 우선순위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나는 14년 동안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그러나 그 시간이 내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는 세월이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독교가 특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상 종교들이 갖고 있는 허물과 약점들을 기독교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가 아니면 기독교는 벌써 역사에서 소멸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마치 중세교회 때처럼 여전히 인간이 주권자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사상에서 ‘인간 중심’ 사상으로 사고의 중심축이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절대 하나님(God)’을 부정하고, 초자연적 역사인 특별계시를 부정하고, 인간이 주인인 세상의 ‘상대적 신(god)’을 섬깁니다.

예수가 없어도 구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에 매료당하고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으며, 기독교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동시에 종교 간의 통합을 이루어 얻게 될 평화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가 말하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진정한 종교개혁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올바로 아는 것(롬 12:2)입니다. 오늘 교회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뜻있는 사람들의 염려 섞인 외침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원을 말하는 교회부터 구원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개혁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개혁은 단순한 깨달음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개혁을 바라는 자성의 목소리는 이제 행동으로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깨달은 진리를 앞세워 변질된 교권과 비성경적이고 반개혁주의적인 도전들을 향해 과감하게 대응해야 할 때입니다. 종교개혁을 500여 년 전에 지나간 역사적 사건으로 여길 게 아니라,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현재적 개혁 운동으로 확산해가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앙노선이 비록 험난해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비진리 앞에 도전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과거 종교개혁자들처럼 진리를 위해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 죽음 앞에서조차 타협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환골탈태의 시대를 맞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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