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교 목사(대구 서성로교회)

애국하고 애족하며 호국하는 마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 김장교 목사(대구 서성로교회)

이르된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삼하 23:17)


6월은 호국의 달입니다. 6월 6일이 현충일이요, 6월 25일은 한국전쟁을 기념하는 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현충일이란 “애국선열과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추모하는 기념일”입니다. 어느 국가든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추모하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감사하는 기념일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나라든지, 어떤 공동체든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미국도 5월 마지막 월요일은 우리나라의 현충일격인 메모리얼데이(Memorial Day), 즉 리멤브란스 데이(Remembrance Day)로 지킵니다. 가정마다 성조기를 게양하고 곳곳에 포스터와 플래카드가 거는데, 한결같이 “We’ll never forget you(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글귀들이 있습니다. 당신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라, 오늘의 이 땅,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 자신과 함께 충성을 다했던 장군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에서 “다윗의 용사들은 이러하니라”고 시작하면서, 나라를 세우고 적군이 침략해 왔을 때 목숨 걸고 지켰던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그 후손들에게 그들의 희생과 충정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후손들에게 ‘기억하라’(Remember)는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잊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3장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마지막 생을 마치면서 국가를 든든히 세우는 과정에서 신앙인에게 있어야 할 덕목을 보여줍니다. 다윗 왕이 산성에 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블레셋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군이 적군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물이 문제였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블레셋 진영 안에 있습니다. 이를 안 다윗의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여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의 뒤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있는데 자신만 물을 마신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물은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길어온 피나 다름이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여호와의 제단에 부어드리고는 하나님께 아룁니다.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물을 길어온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병사들 모두가 목숨을 내놓고 전투에 임하고 있는데, 왕이라 해서 특권을 누리면 안 될 일임을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이런 위대한 리더십은 결국 가나안을 통일하고 통일국가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을 기억해 주는 것이 애국신앙입니다. 애국신앙을 통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신앙인의 호국’입니다. 호국(護國)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신앙인 호국이란 말은 신앙인으로서 자기 조국을 지켜야 된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애국(愛國)하고, 애민(愛民)한다는 뜻입니다. 조국의 번영과 안녕과 질서,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호국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국가는 일정한 영토 안에서, 독자적인 정부(권력)가 조직되어, 법 안에서 백성들이 살아가는 정치적 공동사회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나라를 사랑하고 호국해야 합니다. 그 이유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국가는 종족의 습관이나 전승에 의하여 생긴다는 이른바 ‘습관(풍습) 기원설’이 아닙니다. 공존수단의 사회계약이 국가의 기원이 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인류 사회의 복합성을 해결하기 위한 공동사회의 공익설 역시도 국가의 기원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군서본능(群棲本能), 곧 사회적 충동에서 국가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영토의 경계를 하나님이 정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권세(주권과 통치)의 원천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혈통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습니다.(행 17:24~26) 바로 국가의 존재론적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호국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호국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국전쟁의 비극이 있었고, 8·15 해방의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국치일(國恥日)이 있고, 또한 많은 국경일(國慶日)도 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같은 날은 국치일입니다. 대한제국이 한일합병 문서에 조인하던 날입니다. 삼일절, 광복절, 제헌절 같은 날은 국경일입니다. 이런 날들과 관련해서 순국선열(殉國先烈), 순국열사(殉國烈士), 순국의거(殉國義擧), 순국장병(殉國將兵), 호국단(護國團) 등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예외 없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고 애국하고 애민한 호국열사들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호국정신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호국정신은 신본주의적이고, 영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라이기 때문에 호국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나라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호국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성(나라)을 지키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더욱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택자)들이 살고 있는 장소입니다. 이처럼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사의 무대, 곧 선교의 현장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국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 땅을 살아갔던 지난날의 수많은 신앙선배들은 참으로 애국하고 애족하였습니다. 망국의 슬픔에서 조국을 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선두주자가 불가불 된 것입니다. 저들은 조국을 잃었다는 슬픔과 함께 주를 향한 예배 성소를 빼앗겨 버렸다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망국의 백성이라고 하는 민족적 수난과 함께 신앙인이라고 하는 영적, 십자가적 수난도 함께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제 탄압 때 복음 파수와 전파 때문에 순교 당한 우리의 선배들은 결코 순국선열이 아니라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중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함께 하는 공동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조국의 국적이 있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국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질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동질적인 면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조국은 우리에게 반신적이요, 반기독적이요, 반교회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수단으로서 사회정의가 기초가 되고 공공복리기관들이 우리의 삶과 교회운동에 보호자가 되어주는 일입니다.

올해로 한국전쟁 68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 전쟁의 역사와 그리스도인과 호국정신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북괴는 250대에 이르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내려왔습니다. 불과 사흘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한 달이 지난 7월말에는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왔습니다. 그때 인민군의 최전선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증언했다고 합니다. “이 전쟁은 마치 방망이를 가지고 솜뭉치를 치는 것과 같았다.” 북한은 방망이였고, 남한은 솜뭉치였습니다. 함석헌 씨는 그의 저서 <뜻으로 본 조선 역사>에서 그때의 일을 이렇게 술회합니다. “그때 어찌하여 인민군이 그 큰 세력으로 낙동강을 넘지 못하였는가는 의문지사 중 의문지사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전국교회를 향해서 나라를 위해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을 받은 믿는 사람들은 부산 해운대 백사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금식을 선포하고 울며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기도회 기간 중 폭우가 쏟아졌을 때 한 사람도 떠나지 않고 울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북한에게 점령을 당할 것 같은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국전쟁을 통한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전쟁으로 국군 22만명이 희생되었고, 전쟁에 참여한 UN군, 북한군, 중공군 및 남북 민간인 도합 40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남쪽의 인사들이 8만5000명이나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갔고, 30만명의 전쟁미망인, 10만명의 전쟁고아, 1000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또한 535명의 목사들이 학살당했고, 2122개 교회가 불타버렸습니다. 이처럼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참상 속에 주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승리와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고마움을 가르치고 알게 해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몽고메리 장군은 <전쟁의 역사>라는 책 서문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전쟁을 모르면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역사적인 기로에 서 있습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애국하고, 애족하며, 호국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호국하는 길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엎드리는 민족을 향한 진솔한 기도입니다. 비핵화와 남북의 평화통일과 민족복음화로 나아가기 위한 기도와 말씀으로 세대와 이념의 갈등을 넘어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일어서야 합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