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그레이스 커뮤니티 처치(Grace Community Church)의 설교자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는 2018년에 현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영적 상태를 분석하고 진단하는 책, 를 냈다. 이 책은 1993년에 처음 출간된 책의 증보판이다. 그는 거기서 교회가 ‘구도자를 겨냥하여 교회가 복음의 순전한 교리를 버리고 사람들에게 친화적이려고 오락을 덧입힌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 사고가 발생한 지 어언 13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원자력의 본질적인 문제는 방사선이나 방사능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원자핵을 불안정하게 만들면 에너지가 나오는데 그 결과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배출된다. 우리는 핵분열 때 생기는 생성물을 죽음의 재라고 부르는데 죽음을 불러올 만큼 생명체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물질이 대량으로 생성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핵반응의 본질이며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핵 에너지 이용을 위한 원자력 개발은 그 후 원자력
권위와 권력은 모두 다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권위는 서서히 선한 영향력으로 번져가고, 권력은 급속도로 악한 영향력으로 퍼져간다. 권위가 없는 권력은 자신들의 이익과 유익,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를 실행하면서 산다. 음모가 난무하는 사회, 그 단체는 늘 혼란과 격변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음모는 사회와 단체를 피폐하게 하고 병들게 한다.제109회 총회의 장로 부총회장 선거는 음모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총회 현장에서 덕스럽지는 않았지만 덕스럽게 덮었는데, 다시 총회 임원회에서 총회개혁을 위해 재조사를
비가 계속되더니 눈으로 바뀌고 대설주의보까지 내렸다. 하지만 그 순백의 아름다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봄이 가까이 와있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겨울을 저 멀리 물러간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다.봄의 문턱에서 한국교회와 교단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 여기저기 들리는 소리는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어디 하나 평안한 곳이 없어 보인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누가 총회 임원이 되고, 상비부장이 될 것인가에만 집중돼 있다. 총회를 위해 섬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거의 과정은 볼썽사납다. 변호사를 대동한 법리 논쟁도 있다 하니 한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함에 따라 대학 신입생 비율이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기독교대학과 지방 소재 대학 등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대학들이 다양한 사회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현재 정부의 대학재정 지원사업은 대상 선정부터 대학 규모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 결과 소규모 대학은 제한된 자원 범위 내에서 중·대규모 대학들과 경쟁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특히 소규모 대학들은 예를 들어 기독교 이념 실현과 같은 최초 설립 목적에 따른 고유 사업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증대되고 있다. 일부 대학들은 교육부의
최근 한국리서치의 ‘종교 경전에 대한 인식’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들은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성경에 대한 높은 신뢰와 헌신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 경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탐색한 이 조사는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골고루 섞어서 실시됐고, 종교인 중에서도 개신교, 천주교, 불교를 골고루 배분하였다. 그러나 종교 경전의 개인적인 영향과 사회적인 영향을 묻는 첫 번째 질문을 제외하면, 경전의 성격(“인간의 창작물이나 역사적 기록물? 신의 가르침?”), 경전의 해석(“개인의 신념이나 시대에 따라 종교 경전의
2013년 4월 28일, 영국 선덜랜드에서 열린 마라톤 풀코스 경기에 5000여 명이 참가했다. 그런데 결승선에 들어온 선수 중에서 1명을 뺀 나머지 참가자 모두가 실격 처리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앞서가던 1위와 많은 거리 차이를 둔 채 2위로 달리던 선수가 지정된 코스를 잠시 벗어나 달렸다가 다시 원래 코스로 돌아오는 실수를 한 것이었다. 물론 2위 선수는 자신이 잘못 달렸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2위 선수를 뒤쫓던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가 다 잘못된 코스로 달렸던 것이다.아무 생각 없이 앞사람만을 따라가던 5000명
요즘 지방의 목회자들이 절감하는 문제는 부교역자 청빙이 어렵다는 것이다. 사역게시판에 청빙공고를 내고 지인들에게도 부탁해도 이력서가 들어오지 않는다. 수도권은 조금 덜한 실정이지만, ‘부교역자 대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지 부교역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교단의 목회자 수급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목회자 수급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난 10년간 우리 교단 강도사 고시 합격자 숫자이다. 총회 사무국의 자료에 따르면 2013년 강도사 고시 합격자 수는 71
전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제를 아는가? 그가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어느 날 페르시아를 건국한 고레스왕의 무덤을 방문했다. 그때 그는 고레스왕의 무덤에 새겨진 글귀를 보게 된다. 묘비에는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왕 중의 왕인 나,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한 나, 고레스가 이곳에 묻혀 있다. 그대가 누구든, 그대가 어떤 사람이든, 그대 역시 한 정복자가 되어 내 무덤을 찾아올 것이다. 나 고레스도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하였지. 그러나 언젠가 나는 죽고 나의 제국을 정복한 자가 내 무덤을 찾아오게
2024년 새로운 해가 밝았다. 지금 우리나라 정계는 총선을 앞두고 각자 자기 당의 승리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느라 분주하다. 평상시에 그들은 자기 당의 당리당략을 위해 철저히 움직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항상 선거철이 돼야 국민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런 행태들에 대해서 이제는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아예 우리가 그들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단 정치는 어떠한가? 지난해 9월, 108회기 총회가 새로운 임원진이 구성돼 출범했다. 총회장은 총대들에게 ‘명품총회’
이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선정해 발표했다. ‘견리망의’(見利忘義)가 그것이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이다. ‘각자 자신의 이익 찾기에 급급해 의로움을 버리는 사회’, 우리 사회 전체가 공동체성을 잊어버린 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공멸(共滅)의 길이다.한국교회는 여기에서 예외일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중심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됐고, 이젠 ‘각자도생’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한해를 마감하고 새해
교회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사람들, 곧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울러 교회사는 여전히 그 은혜의 수혜자들이 좌우로 치우치는 진자 운동의 실상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은혜의 방편으로서 최고의 제도인 ‘설교’에 있어서 ‘우로나 좌로 치우지 말아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교리’와 ‘삶’의 두 요점은 모든 설교가 견지할 진수적 요소임을 누가 부인하랴. 교회사 속에서 찬란한 영적부흥과 각성 시대의 대표적인 설교들은 한결같이 ‘구원의 교리’와 ‘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몇 사람을 들자면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루터와 칼빈일 것이다. 1세기의 바울과 4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와 16세기의 루터와 칼빈의 신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필자도 하나님의 섭리로 약 35년 전에 그들의 신앙과 신학을 접할 수 있었다. 나의 스승 고(故) 이금용 목사님을 만나 ‘구속사적 관점으로 본 성경 공부’를 했고,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을 접하였고, 김홍전 박사의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성을 공부하게 됐다. 총신대학원에서 만난 서철원
12월이면 언제나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열심히 살았노라고 하지만 딱히 해놓은 것은 없이 그냥 한 해가 지났기 때문이다. 막연한 덧없음 속에 인생은 그렇게 또 흘러가리라는 패배감마저 찾아든다.사람들은 이런 패배감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보다. 성탄을 알리는 트리의 불빛과는 부조화하지만, 술과 파티로 연말을 보낸다. 독주(毒酒)를 마시며 지난 시간들을 망년(忘年)해 보려고 한다. 물론 그런다고 모든 것이 잊혀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소망들을 가져보는가 보다.독주라는 단어, 참 재미있다. 그 뜻이 참으로 많다.
108회기 총회가 하는 “교회여 일어나라”라는 운동이 지금처럼 ‘성장과 부흥’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교회로는 제발 일어나지 말았으면 한다. 그렇게 대형교회를 꿈꾸는 교회로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회는 너무나 세상적이고 또 세속화됐기 때문이다. 성장과 부흥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복음은 진부해졌고, 신앙은 상품화됐으며 신학은 이미 삶의 체계로서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1세기의 교회, 그 원형의 교회로 일어나야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운 교회로 일어나서 사도행전 17장 6절의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교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