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복 목사(창훈대교회)

회개의 고백으로 십자가 보혈 의지하는 참 예배자 됩시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 이상복 목사(창훈대교회)

중세교회는 본질을 잃고 변질됐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도 기독교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회복되어야 할 많은 것들 중에 변질된 예배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즘 다양한 예배 풍속도가 있습니다. 휴양지로 유명한 미국의 플로리다의 한 교회에서는 일명 ‘급행예배(Express Worship Service)’가 있는데, 설교 기도 찬양 등 모든 순서가 20분 안에 끝납니다. 이 급행예배는 골프, 낚시, 등산, 여행 등의 스케줄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제공된 것인데 날로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일명 ‘파킹랏 예배(Parking Lot Service)’도 있습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야외극장처럼 주차장에 대형스크린를 설치해 놓고 차 안에서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도록 고안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 미국의 일부 교회에서는 주일예배를 아예 수요일로 옮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요예배를 주일예배로 드리고, 주말은 온전히 자신들의 스케줄을 따라 편안하게 움직이며 마음껏 즐기라는 취지로 마련한 예배라 합니다. 또한 주일날 바쁜 스케줄이 있거나 몸이 힘들고 피곤할 때는 어쩔 수 없다며 인터넷 설교만 듣고 주일예배를 때우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이 예배이지만, 초신자 뿐 아니라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 가운데도 성경적 예배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각자의 소견을 따라 자기 방식대로 예배를 이해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를 ‘설교를 듣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분들은 아무리 늦어도 설교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꼭 예배당으로 들어옵니다. 물론 설교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설교를 잘 듣는 것과 기독교 예배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늘도 주님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시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형식과 타성에 젖은 예배, 빈껍데기뿐인 습관적인 예배가 되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경 전체를 통틀어 기독교 예배가 무엇인지를 교훈해 주는 말씀입니다. 교훈의 초점이 성공한 예배자 아벨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예배자 가인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그 만큼 참된 예배자가 되기 어렵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실패한 예배자 가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교훈 얻을 수 있는 기독교 예배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가인은 실패한 예배자의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예배를 거절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가인이 드린 제물에서 찾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피가 없는 땅의 소산물로 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땅을 경작하라는 명령을 주셨고(창 1:29), 노아시대 이전까지 인간의 주식은 채식이었으며(창 9:3),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나중에 모세시대에 가서야 확정된 것입니다. 레위기에 소개되는 5대 제사 중 소제가 피흘림 없이 곡물로 드려지는 제사였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단지 피가 없는 농산물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가 거절되었다는 것은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가인의 예배가 실패한 이유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5절상) 이 구절을 원문으로 보면 초점이 ‘가인이 드린 제물’이 아니라 ‘가인이라는 사람’에 맞춰져 있음을 두 가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 어법’을 통해서입니다. 히브리 어법은 동사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주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그것을 문장 맨 앞에 위치시킵니다. 본문을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가인’이 문장 맨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창세기 기자는 ‘가인’이라는 사람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히브리 단어 ‘사아’의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받다, 받아들이다(accept)’로 번역될 수도 있고, ‘존중하다, 존경하다(respect)’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개역개정성경은 이 단어를 가인이 드린 제물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이 가인과 그가 드린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권위 있는 많은 번역본들은 이 단어를 가인이라는 사람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이 가인과 그가 드린 제물을 존중하지 않으셨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KJV에서는 이 구절을 ‘하나님이 가인이라는 사람을 존중해 주지 않으셨다(He had not respect Cain)’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보면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이 제물보다는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인 가인에게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가인의 예배를 거절하신 이유는 그가 드린 제물 때문이 아니라, 가인이라는 사람의 삶과 인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자 가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의 예배를 받으실 수 없었던 걸까요? 자신의 예배가 거절되었을 때 가인이 보인 반응을 보면 평소 그의 됨됨이가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예배가 거절되자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해 버렸습니다.(5절하)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자신의 예배를 거절한 하나님께 분통을 터트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가인에게 예배가 거절된 이유를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7절상) 이 말은 ‘네가 평소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그 삶의 열매를 가지고 나왔다면 내가 어찌 너의 예배를 받아주지 않았겠느냐’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직접적으로 예배가 실패한 이유는 제물 때문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삶 때문임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예배에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신 하나님은 가인에게 다시 예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하)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가인아! 나는 네가 예배에 성공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예배의 성공을 위해서는 너의 삶을 돌아보면서 악한 행위를 버리고 회개의 열매를 가지고 나와야 한다. 그럴 때에만 너의 예배는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배의 성공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가인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죄의 문제가 반드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 회복의 방법을 일러 주시면서 하나님은 가인과의 관계 회복을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인은 하나님의 애틋한 충고를 거절하고 결국에는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8절하)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12절에서, 가인이 왜 동생을 죽였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결국 가인이 드린 예배에 드러난 문제는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라는 사람을 받으실 수 없었기에, 그가 드린 제물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예배를 받으실 수 없었던 이유는 그의 악한 삶, 불신앙적인 삶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가인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구하거나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욕심과 정욕대로 갖가지 죄악을 일삼으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배를 드릴 때는 자신이 거둬들인 수확물 중에 손에 잡히는 데로 아무 거나 가지고 나와서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죄악된 삶을 청산하지도 않은 채, 그냥 와서 맹목적이고 습관적으로 드린 가인의 예배를 받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거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사야서를 통해 이렇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59:1,2) 우리가 그렇게 많은 예배를 그렇게 자주 드리면서도 성공하는 예배자가 되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삶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성공을 위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교훈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 24)

가인처럼 실패한 예배자가 되지 않으려면 두 가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먼저 회개의 고백과 열매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놓고 생각해 본다면,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면서 지은 죄가 있다면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회개의 고백과 함께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죄의 문제를 이미 그 아들 예수님을 통해 완벽하게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완전하신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해서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일 1:9)

지금껏 어떤 예배자로 살아왔습니까? 혹시 가인처럼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예배했던 무모한 예배자는 아니었습니까? 지금껏 셀 수도 없이 많은 예배를 드렸지만 회개의 고백과 열매도 없이 십자가 보혈의 피를 의지하지도 않은 채 예배했기에 가인처럼 실패한 예배자는 아니었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예배 때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지은 죄에 대해서는 중심으로 뉘우치는 회개의 고백과 함께 예수님이 흘리신 십자가 보혈의 피를 의지하는 참된 예배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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