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 목사(서울비전교회)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신현수 목사(서울비전교회)
신현수 목사(서울비전교회)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파송하시는 중요한 부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당신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단순히 삶과 분리된 종교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는 삶인 지를 자세하게 알려주십니다. 파송과 전도의 실행(5~15절), 미움과 박해(16~23절), 영혼의 소중함과 제자됨의 시인(24~33절), 피할 수 없는 갈등(34~39절),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제자로서 삶을 실천하는 현장(40~42절)을 말씀하십니다. 메튜 헨리는 이 본문을 ‘예수님의 제자 파송에 붙인 설교’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냉수 한 그릇’(42절)이라는 생활용어로 제자로서 삶의 실천을 말씀하십니다. 이 용어는 종교적 용어가 아닙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중동지방에서 물 한 모금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삶의 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작은 행위가 신앙의 결과로 주어지는 상(賞)과 연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최근 세계 전역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일상생활의 영성을 재발견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복음이 너무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 삶의 현장과 유리된 측면을 극복하려는 긍정적 시도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한 마디 말로도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냉수는 ‘누구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하십니까?

“이 작은 자 중에 하나에게” 마태는 삶의 현장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되기 쉬운 존재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자신의 복음서를 기술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 작음 때문에 존재 자체가 가벼움으로 취급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회적 질병으로까지 대두된 ‘갑질’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동일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가진 것이 적다는 것 때문에 소중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가벼운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한 항변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사람에 대한 건강한 시각이라고 하십니다. 작은 자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존재일 수 있지만 제자에게 있어서는 신앙적 실천 대상의 우선순위라는 것이 제자도의 첫 걸음일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동안 사역의 현장에서 작은 이들을 놓치고 있지 않았는지에 대해 돌아보게 합니다. 이미 초기 교회에 야고보 사도는 지도자들이 사람을 대할 때 경제적인 부(富)를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함을 경고했습니다.(약 2:3~6) 오늘 교회 현장이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이 교회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는가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전체 기독교의 미래는 밝지 않을 수 있음을 사회학자들까지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다음으로 ‘무엇을’ 주라고 하십니까?

“냉수 한 그릇” 왜 예수님은 그냥 물 한 그릇이라 하지 않고, ‘냉’(冷)이라는 단어를 붙이셨을까요? 그것은 물을 주는 자 입장이 아니라 받는 이의 입장에서 효용성을 더 강조하신 것이 아닐까요? 받는 이가 정말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것까지 염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동안 교회가 복음 사역을 나름 열심히 해 왔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 좀 더 신중하게 복음을 받는 이의 입장까지 헤아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복음은 전하기만 하면 됐지, 그 다음은 받는 이들의 책임이라는 사고는 없었는 지 반성해 봅니다.

복음의 실천 현장은 어디 입니까?

‘일상’(日常)이 제자도의 실천 현장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더 깊은 도전을 주는 부분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상(賞)과 연결되는 현장이 바로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행위가 실천되는 일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상(日常)은 한자상으로 ‘반복되는 바쁜 삶에서 사람으로서 행할 도를 행하는 것’이라는 특이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마땅히 행할 것’이 세속과 분리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매일의 반복되는 삶의 현장’이라는 한자 의미가 신기합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동안에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려고 너무나 인간적인 힘을 써왔지 않았는가?”하는 마이클 프로스트의 지적을, 우리가 소홀히 해왔던 것에 대한 지적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서구 교회가 자신들의 교회를 둘러싼 사회적 변화의 격랑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미 그 싸움에 밀려 쇠락의 길로 접어든지 오래되었다는 분석마저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대안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가고 있는 듯합니다. 특히 북미 학자들을 중심으로 최근 교회란 단어 앞에 영어사전에도 없는 ‘선교적’(missional)이라는 신조어를 붙여서 자신들의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구체화 해 나가고 있습니다.

왜 교회 앞에 ‘선교적’이란 단어를 붙였을까요? 이것은 이제껏 교회가 선교를 소홀히 해왔으니 앞으로 더 많은 선교를 수행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선교적 교회라는 말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반성으로 교회의 성경적 본질을 회복하자는 운동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이 종래에 있어왔던 또 하나의 운동으로, 일시적으로 유행하다가 사라지는 것쯤으로 단정합니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운동은 서구 교회가 그동안 자신들의 교회 운영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대안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와 동일한 구조가 아닐 수 있고, 또 역사적 궤적도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임상적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한국교회는 이 운동을 한국교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한국에 맞는 대안들을 모색하는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모든 사상이나 이론에 대해 신학적인 관점에서 완전한 합의를 갖기가 쉽지 않기에 장단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선교적 교회운동에서 귀담아 들을 부분이 있다면 일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동안 서구 교회는 주일 중심의 교회를 강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중의 삶과 연관성이 부족한 신앙생활을 영위해 왔다는 반성을 합니다. 성도의 에너지를 교회에 다 쏟아 붓게 해 삶의 현장에서 신앙적 전투를 할 힘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 안을 메웠던 일요군중들이 월요일의 길거리에서는 더이상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비(非) 존재적 존재’로 수백 년을 지내오다 어느덧 허약해진 자신들의 모습을 마주하고 놀람과 패배감에 봉착했습니다.

그러나 서구 교회는 비록 소수이지만 이제 다시 일상에서의 신앙적 표현에 눈을 뜨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이 난무하지만 그 속에서 작은 희망들이 싹트고 있습니다. 젊은 사역자들이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을 마음에 품고 우리 사회의 다방면에서 삶의 현장의 문제들을 부둥켜안고 뛰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 빛이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누를 수 없는 빛으로 존재하다가 서서히 세상을, 그리고 일상을 환하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젊은 사역자들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마음으로 응원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다양하고 처절한 목마름의 외침들이 넘쳐납니다. 교회는 다시 그들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복음의 냉수’를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창하고 화려한 제자도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분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작은 의무를 소홀하지 말라는 실제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화려한 종교 행위가 종교지도자들의 율법 준수를 통해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외적인 규모와 질서를 유지한 행위들이 예수님의 관심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점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리는지. 아니면 향방 없는 종교행위로 무한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고전 9:26) 우리는 오늘날에도 길거리에서 냉수 한 그릇을 기다리며 목말라 애타는 심령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무시한 채, 화려한 종교적 행사로 달려가고 있지 않은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냉수 한 그릇의 작은 행위는 이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준엄한 예수님의 명령으로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그 영혼이 목말라 냉수 한 그릇을 찾는 작은 자가 아닐까 하는 일상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갖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살아있는 주님의 음성임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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