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복 목사(창훈대교회)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 4:4)

▲ 이상복 목사(창훈대교회)

우리나라 토속신앙의 풍토 속에서 생겨난 예배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입니다. 예배시간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 삶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이 자신의 예배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독교 예배의 핵심은 믿음과 삶의 열매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 시간에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잘못한 것에 대한 회개의 열매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예배를 받아주실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예배가 실패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성공한 예배자의 모델로 제시되는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예배자를 원하시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아벨보다는 가인이 예배에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많았습니다. 집안의 첫째 아들이었던 가인에게 걸었던 부모의 기대는 그 이름의 뜻인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둘째 아들이었던 아벨이라는 이름은 ‘바람, 헛됨, 아무 것도 아님’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름만 비교해 봐도 동생 아벨은 형 가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담은 집안의 장자였던 가인에게 자신이 경작하던 모든 땅을 유산으로 물려주었고, 그 결과로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넘겨받은 합법적인 상속자였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이을 첫 번째 계승자였습니다.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면 아벨보다는 가인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만약 하나님이 한 사람의 예배만 받으신다면 당연히 가인의 예배를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담 집안의 미래일 뿐 아니라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이을 첫 번째 계승자였던 가인의 예배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되었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사실 본문은 예배에 성공한 아벨보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에게 더 많은 관심과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아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추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예배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의 일부를 가져다가 그것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Cain brought some of the fruits of the soil as offering to the Lord, NIV 3절하)” 반면에 아벨은 자기가 기르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Abel brought fat portions…the firstborn of his flock, NIV 4절상)” 창세기 기자가 두 예배자를 비교하면서 주목하는 것은 피가 있는 동물이냐 혹은 피가 없는 곡식이냐가 아니라, 자신의 직업에 따라 제물을 가져오는 ‘예배자의 태도’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거둬들인 수확물의 ‘첫 소산(the first fruits)’이 아니라 단지 그가 수확한 농산물의 ‘일부(some)’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자신이 기르는 가축의 ‘일부(some)’가 아니라 ‘첫 새끼(the firstborn)’를 가져왔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크게 대조되는 것은 ‘피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드려진 제물이 처음 것이냐 아니냐’하는 점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피 제사뿐 아니라 곡식제사(소제)의 유효성도 인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제물이 짐승이라면 ‘첫 새끼’를, 그리고 제물이 곡식이라면 ‘첫 열매’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레 27:26상)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출 23:19상)

그러면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지 못한 가인과 첫 새끼를 드린 아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아벨과 그렇지 못했던 가인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간격이 있습니다. 평소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마음가짐과 삶이 드려진 제물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장자였던 가인은 약속을 이을 후계자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아담은 장자였던 가인에게 그가 경작하던 모든 땅을 상속해 주었고 그 결과로 농사짓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에게는 항상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최고를 자부하던 가인은 정작 하나님께 제사하는데 있어서는 최초이자 최고의 것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먹다가 남은 것의 일부를 드렸는지 아니면 곡간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다가 드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의 중심에는 이미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왕이 된 가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평소 가인은 자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그저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갖가지 죄악을 일삼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평소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불신앙과 불순종의 삶을 살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가져와서 드리는 제물과 가인을 받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장자였던 형에 비해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삶의 중심에는 가인에게 없었던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분명한 신앙고백과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항상 ‘최초의 것’, 즉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아벨이 제물로 드린 ‘첫 새끼이자 가장 좋은 것’이라는 표현 속에는 평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그 믿음을 증거하는 그의 순전한 삶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참 믿음과 순전한 삶의 열매로 드린 제물과 함께 아벨이 드린 예배를 가장 기쁘게 받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처음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보통 사람들은 드릴 수 없는 화려하게 치장되거나 거창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참 믿음의 고백과 순전한 삶의 체취가 담겨 있다면 무엇이라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시거나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인생들이 겪는 모든 고난을 다 경험하신 주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실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히 4:15). 주님은 우리가 조그마한 시련에도 쉽게 흔들릴 수 있고, 깨지기 쉽고, 상처받고 쉬운 연약한 인생들임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의 진솔한 믿음의 고백이 담겨져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가장 귀한 것으로 받아 주십니다. 주님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두 렙돈을 부자가 드린 어떤 헌금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두 렙돈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가 믿음의 고백으로 드린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입니다(막 12:44). 주님이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 소년이 순전한 믿음으로 꺼내 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만들어진 기적입니다(요 6:9). 주님은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무심코 건넨 냉수 한 그릇이라도 결코 잊지 않고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10:42).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큼 작아 보이지만 순전한 믿음이 있다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17:20). 본문에서 아벨이 드린 ‘처음 것’이라는 표현 속에는 거대하고 거창하고 화려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찮아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의 고백과 그 고백 위에 세워진 순전한 삶의 열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처음 것’을 드렸던 아벨과 같은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의 고백이 담겨져 있고 순전한 삶의 체취가 담겨져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이 아무리 작아 보이고 하찮아 보인다 할지라도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으로 받아 주십니다. 정신없이 바쁜 한 주간이었지만 잠시라도 짬을 내어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별하여 드린 그 시간을 가장 귀한 제물로 받아주십니다. 한 주간 동안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는 삶의 터전에서 불법과 편법과 불의에 무릎 꿇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서 믿음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순종한 바로 그 순간을 가장 귀한 제물로 받아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과 함께 순전한 삶의 열매를 가지고 나온다면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순종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처음 것’, 즉 가장 귀한 예물로 받아 주십니다. 우리도 아벨처럼 성공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면서 실패하고 넘어진 것에 대해서는 회개의 열매를 가지고 나와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면서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믿음의 승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감사의 열매로 올려드리면서 더 큰 승리를 위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주님의 부활의 능력 덧입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아벨처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과 함께 순전한 삶의 열매를 가지고 나아가는 참된 예배자들이 됩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