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훈 목사(익산 꿈이있는교회)

요절: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노지훈 목사(익산 꿈이있는교회)
노지훈 목사(익산 꿈이있는교회)

매년 6개월간 어두운 겨울을 지내는 노르웨이 리우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세 개의 대형 거울로 태양을 반사하여 도시 한가운데로 햇빛을 끌어오는 방법을 실현했습니다. 이 지역은 해발 1883m의 산지에 둘러 싸여있어, 일 년 중 겨울이 시작되는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장장 6개월 동안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2013년도에 와서야 3개의 거대한 특수 거울을 산위에 설치하여 마을 광장에 태양 빛을 반사하는 방법으로 긴 어둠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거울에 반사된 햇빛이 처음으로 마을 광장에 비춰질 때 아이들은 즐거워했고, 마을 사람들은 노르웨이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으며, 일부 주민은 일광욕을 즐기며 칵테일을 마셨다고 합니다.

이 아이디어의 기원은 무려 1913년으로 거슬러 갑니다. 당시 샘 에이드(Sam Eyde)이라는 사람이 처음 고안을 하였지만 막대하게 들어가는 자금과 기술력의 부족으로 여의치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약 100년만인 2013년 한 독지가의 기부로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100년 전 샘 에이드의 아이디어와 100년 후 한 독지가의 헌신이 만나 3500명의 리우칸 시민들이 암흑의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너희는…”이라고 시작하며 ‘너희’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바로 앞에서 산상수훈을 통해 팔복을 선포하시며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너희’란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팔복에 관한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고, 천국을 소유한 우리들을 ‘너희’라고 부르시며 연이어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세상 속의 소금과 빛’이 아니라 ‘교회 안의 소금’, ‘교회 안의 빛’에 불과한 모습으로, 자신들이 소속된 교회에서만 잘하는 사람들이 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천국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의 소금’과 ‘세상속의 빛’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할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고 교회 안에만 갇혀 살아간다면 복음을 증명하고 보여줄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소금을 얻는 독특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요단강에서 사해에 이르는 요단 지구대는 빙하기 전 바다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긴 해수면 아래에 위치한 지형이라 소금을 땅에서 파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모양은 소금이지만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들이 나옵니다. 아마도 빗물 때문인지 소금의 원래 맛을 잃어버려 모양은 소금인데 가치를 내지 못하는, 돌덩어리보다 못한 소금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소금들은 수고하고 기대한 만큼 결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고,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며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너랑 나랑은 삶의 방식이 달라야 해.’ ‘똑같은 세상 속에서 살지만, 너는 거룩함을 유지하고 무언가 나와 다른 확신에 가득 찬 믿음으로 이겨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어야 해.’

그래서 그들은 가끔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 안의 믿음을 테스트 해봅니다. 우리가 거기에 휘둘리며 유혹에 넘어가면 예상했던 반응이라고 비웃지만, 믿는 사람들이 진실하고 깨끗하게 유혹을 이기며 어려움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견뎌내면 놀라워합니다. 성도 자신의 거룩함을 지켜나가는 정신과, 주변까지 거룩함으로 물들게 하는 순수함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감사해 합니다.

소금인줄 알았는데 꺼내보니 짠맛이 나지 않고 돌덩어리라서 느끼는 실망감처럼 ‘참 그리스도인인줄 알았는데 드러내보니 나랑 별 다름없는 사람이구나’하고 사람들이 느끼게 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분명 ‘빛과 소금’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존재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까지에 기록된 아론의 축복문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 중 24절 ‘너를 지키시기를’이라는 단어에서 소금을 떠올립니다. 소금에는 보존의 기능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유업이 부패하지 않도록 깨끗하게 보존해주는 것이 바로 소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과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고, 기부하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25절에 나오는 ‘네게 비추사’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빛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소금과 빛의 조화는 이처럼 구약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정체성은 ‘빛’과 ‘소금’이라는 두 단어로 더욱 분명하게 정해집니다. 천국을 소유한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썩어져가는 것들을 보존하는 소금처럼, 어두운 곳들을 밝히 비추는 빛처럼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는 ‘너희 착한 행실’이라는 표현으로 빛의 역할 중에서도 특히 도덕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이미 구원 받은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도덕성을 나타내는 빛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거룩한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홍일식 총장이 LA에 위치한 한국식당을 방문해 식사를 할 때 식당 주인의 얼굴이 무척 어두워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변의 흑인 갱단들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찾아와 시비를 걸고, 애써 모은 돈을 빼앗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서 홍 총장은 식당 주인에게 정기적으로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흑인들이 자신의 부모를 모시고 오도록 해서 식사를 대접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세월이 지나 다시 그 지역을 방문하여 식당을 찾았을 때 홍 총장은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매월 흑인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오면 식사를 무료로 제공한 그 식당에 어느 날부터 흑인들의 행패가 사라졌고, LA 폭동 때는 그 지역 흑인들이 달려와 식당과 사장 가족을 보호해주었다는 것입니다. 평소 자신들에게 잘해준 가게가 불타 사라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며 지역사람들이 보여준 감사의 표시라고 합니다.

전북 익산에 위치한 저희 꿈이있는교회는 개척할 때부터 지역사회의 필요에 따라 선한 일들을 실행하는 ‘겨자씨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진행했습니다. 겨자씨프로젝트는 지저분한 곳의 쓰레기들을 치워주거나, 더러운 음식물 쓰레기통을 씻어주는 방식으로 마을의 청결을 유지합니다. 작고 심플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필요를 발견하고,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인 사역으로 좋은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직접 보여주어 주민들에게 착한 교회의 이미지를 세워가며,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분리수거하던 중에 경비아저씨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왜 교회가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이사한 지 일 년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벌어진 일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전 이미지가 매우 안 좋아서였는지 경비아저씨의 목소리는 매우 격양되었고, 전도사님은 무척 당황하면서 지난 1년 동안 교회가 이 아파트 주변의 쓰레기를 줍고, 방역을 하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치우는 다양한 사역을 진행해왔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주일에 출근하지 않는 아저씨는 자신은 그런 모습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파트주민들이 오히려 교회를 대변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봤어! 젊은 목사와 성도들이 쓰레기를 줍고, 청소하는 모습을 우리가 봤어. 당신들은 아파트 주변에 방역 한 번 안할 때 교회가 나서서 방역도 해주고, 음식물 쓰레기통이 더러워도 당신들이 한 번도 치우는 걸 못 봤는데 교회가 청소하는 걸 우리가 봤어”라고 교회 편을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아파트 관리소장이 직접 교회를 찾아와 사과하고, 그 경비 아저씨와도 관계가 좋아져 이제는 그분이 교회 마당을 청소해주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빛처럼 소금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이 쌓이고 쌓일 때 하나님나라가 감출 수 없이 드러나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우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원(光源)이 아닙니다. 태양은 핵융합의 과정을 통해서 엄청난 빛과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그러나 밤에 비취는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다만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할 뿐입니다. 노르웨이 리우칸 마을을 비추는 대형 거울처럼 우리는 햇빛을 받아 비추어야 합니다. 성경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 1:8)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을 증거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해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두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성육신하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존재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변화되고,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으로 살려면 철저히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를 통해, 바로 나를 통해 복음이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가난한 중국인이 멀리서 선교사를 찾아와 세례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그에게 어디서 복음을 들었냐고 묻자, 그는 “저는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영파라는 곳에 사는 한 가난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은 한때 아편 중독자에다 매우 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를 접하면서부터 모든 생활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아편을 끊었고,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바로 그를 통해 복음을 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복음을 듣기는 하지만, 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오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통해 보여져야 합니다.

어두움에 쌓인 마을에 햇빛을 끌어들이는 아이디어를 내었던 샘 에이드와 3500명의 시민들을 위해 9억이라는 큰 돈을 기부한 독지가의 헌신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한국사회의 어둡고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도 빛을 비춰줄 건강한 교회들과 세상의 오염을 막는 소금 같은 거룩한 성도들이 세워질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생성해 낼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스로 맛을 보존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 곁에 붙어있어 거룩함을 유지할 때에만 우리는 마침내 ‘세상 속의 빛’과 ‘세상 속의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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