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영 목사(동행교회)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는 은혜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9)

▲ 김일영 목사(동행교회)

지난 주에 자주 가는 국숫집에서 식사를 하던 중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앞치마’라고 외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보다 앞서 식사를 마친 한 아가씨가 식당에서 준 앞치마를 그대로 입은 채로 계산을 끝내고 식당 문을 나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곁에는 남자친구가 있었는데도 두 사람 모두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 소리 때문에 식당 문을 나서다가 뒤돌아선 아가씨는 앞치마를 서둘러 벗은 뒤 부끄러웠던지 도망치듯 빠져나갔습니다. 그 아가씨가 앞치마를 입고 있었는데도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듯이,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입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휘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가장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는 단어 중의 하나가 ‘은혜’라는 말일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도 은혜라는 말이 들어간 대목에서는 우리가 눈시울을 붉힐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그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지난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개인기도하는 시간에 이 찬송을 부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가슴으로 저며 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체할 길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본문인 누가복음 17장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 은혜 받은 사람은 많아도,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은혜 받은 다수, 감사하는 소수

은혜란,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죄 많은 인생들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조건없는 호의나 혜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기초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이 우리들 가운데 나타난 모습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감사는 마땅히 은혜를 받은 우리 사람들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다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근거한 것이라면 감사는 우리들의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 나와서 그분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가 열 사람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고작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똑같이 병고침을 받았는데도,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시에 유대인 사회에서 멸시받던 사마리아 출신의 나병환자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쩌면 10퍼센트 밖에 안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를 내리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햇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은혜는 다수가 받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오늘날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런 배은망덕한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안타까워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열 명이 고침을 받았는데 아홉은 어디 가고 겨우 한 사람만이 찾아와 감사하느냐고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를 놓쳐버리고 사는 인생이 되지 맙시다.

우리는 똑같이 하나님께 창조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예수님 덕분에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어떤 이는 기뻐하며 감사하고, 어떤 이는 여전히 불평과 원망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돌아와 감사하고, 어떤 이는 망각하고 떠나갑니다.(눅 17:14~19) 어떤 이는 받은 직분에 감격하여 충성하지만, 어떤 이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주님은 은혜를 망각한 사람,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들은 대체 어디에 갔느냐고 오늘도 묻고 계십니다.

기도의 볼륨과 감사의 볼륨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깨닫고 그 사랑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답답할 때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면,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도 같은 볼륨으로 감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도의 볼륨과 감사의 볼륨이 같아야 합니다. 은혜 받은 만큼 감사를 표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나병환자 열 명이 모두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15절에 의하면, 그 중의 한 사람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답답할 때 기도했던 볼륨과 해결 받았을 때 감사하는 볼륨의 크기가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부디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간증의 말을 많이 하십시오. 감사의 찬송을 많이 부르십시오. 감사의 예물을 자주 드리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맡은 직분에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묻고 계십니다. 열 명이 은혜를 받았는데,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등장인물들 중에 돌아오지 아니한 아홉 명의 나병환자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오늘날의 목회현장에서도 느끼는 안타까움 중 하나입니다. 답답할 때 그렇게 매달리던 자들이 정작 감사해야 할 때에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에서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는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암 환자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그 말에 너무 인색했던 것이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부터라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입술로 표현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깨달은 자의 감사

주님의 은혜로 고침 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들 가운데 사마리아 출신의 한 나병환자는 다른 아홉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일평생 짓눌려오던 나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해방된 순간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은혜인 줄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쁨에 못 이겨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것입니다. 넘치는 주님의 은혜에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사람은 병고침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 순간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얼마나 애태웠던가요?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요? 그 저주스러운 육신 때문에, 썩어 들어가는 육신을 부여안고 얼마나 울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깨끗하게 고침 받았으니 주님의 크신 은혜에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주님께 달려왔던 것입니다.

본문 15절과 16절에서 그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18절). 우리가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돌아와 감사한 그 사마리아 사람을 향해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우리 주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을 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는 더욱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토레이 목사님은 “감사 충만이 곧 성령 충만”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고 은혜 충만한 삶, 기쁨 충만하고 행복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거든 먼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는 또 다시 주실 은혜로 들어가는 통로가 됩니다. 감사의 문이 열리면 우리는 비로소 행복의 집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부터 18절에서 전하기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좋아하여 그의 무덤 비문에 새겨놓은 구절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대개 뭔가 특별한 일이 있어야만 감사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감사 습관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사는 오늘 하루의 평범한 일상이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절로 감사할 수 있겠지요. 지나간 날들 동안에 내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노라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보고 감사하는 소수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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