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순종으로 생명을 살리는 기적의 통로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4)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합 왕을 피해 숨어 지내던 그릿 시냇가에 물이 말라버렸습니다. 시냇물이 말라버린 이유는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기를 선포하고 그렇게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물이 말라버린 그릿 시냇가에 계속 머물자니 생존에 필요한 요소가 결핍된 상황이고, 떠나자니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러한 결핍의 상황에서도 자신이 갈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엘리야에게는 시냇물이 말라버렸다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움직임의 기준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워나가야 할 순종하는 신앙인의 바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인 줄 믿고 사는 신앙인이라면,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쁨으로 구하는 신앙인이라면, 삶의 길에서 말씀을 통한 신호를 받고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이고 싶고,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조바심이 날 때에도 기다려야 합니다. 고속도로에서는 새로운 속도 표지판이 나타날 때까지 이전의 속도 표지판을 기준으로 합니다. 새로운 부르심이 있을 때까지는 이전에 부르신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엘리야가 결핍의 자리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머물고 있을 때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9절)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르밧 땅은 열렬한 우상숭배자였던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 통치하던 시돈 지역입니다. 하나님은 시돈이라는 이방 땅, 우상숭배의 땅, 엘리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이세벨의 고향 땅에서 당신의 종을 먹이시고 보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꺼려하고 싫어하는 어떤 장소나 상황이 하나님의 기적이 마련된 곳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외적인 장소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여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여부’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과부에게 보내시겠답니다. 남의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구설거리를 주려고 이러시는 걸까요? 부정한 까마귀를 사용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보호자 없이 홀로 된 여인을 사용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은 외적인 조건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쓰고자 하시면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위대한 역사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법으로도 일하실 때가 있습니다.

순종할 때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과연 알고 있었을까요? 그래서 묵묵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결과적으로는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순종은 결과를 미리 알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분에 대한 인격적 신뢰가 믿음의 본질이고, 그 믿음 때문에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로부터 사르밧까지의 먼 길을 걸으며 엘리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라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걸었을 것 같습니다. “사르밧으로 가라고? 왜 하필 시돈 땅이지? 과부를 통해 먹이시겠다고? 왜 하필 과부야?” 그나마 마음을 고쳐먹고 순종해야겠다고 자신을 설득하려고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나를 먹이시려고 굳이 그 과부에게 보내시겠다면, 그 여인은 꽤나 부자인가보다.”

어쨌든 엘리야가 말씀에 순종하여 먼 길을 여행하여 사르밧 성문에 도착했을 때 마침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어떤 근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엘리야는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람인 줄 알아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10, 11절) 당시가 여행객과 손님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하는 풍습이 있었던 시대였다고는 하지만 내가 나서서 대접하겠다는 상황이 아니라, 처음 보는 남자가 다짜고짜 먹을 것을 가져오라는 말에 이 여인이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그런데 이 여인도 엘리야가 선지자인 줄을 알아보았던 모양입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절) 이 여인의 형편을 듣고 보니 부탁했던 사람이 무안할 지경입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말입니다. 우리가 이 상황에 처했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그런데 이 여인의 말에 대해 엘리야가 대답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 14절)

엘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의 형편 다 안다. 먹을 것 없는 형편도 다 안다. 죽고 싶어 하는 마음도 다 안다. 지금 시키는 것 말고는 네 생각대로 해라. 그런데, 일단 내 말대로 해 봐라!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봐라! 하나님께서 너의 쌀통에 쌀이 떨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다.” ‘내 말이 없으면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던 큰소리에 이어, 이건 또 어디서 온 확신이며 자신감입니까? 더 놀라운 것은 여인이 엘리야의 말을 듣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15,16절)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길, 자신과 남을 살리는 길, 하나님의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신다면,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있으셔서 헌신과 헌금을 요구하신다면, 감당할 능력과 재물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무슨 아쉬운 것이 있으셔서 우리에게 구걸하시듯이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것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인류 존재의 전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의 것이 아닌 곳은 단 1평방 인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성경 구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9~13)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이 아무 소용없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불쌍한 여인에게 굳이, 그것도 마지막 한 끼 먹고 죽으려는 사람에게서 그 마지막 가진 것까지 요구하십니까? 그것은 마지막 남은 것까지 다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이 여인의 주 관심은 한 끼 식사와 죽음뿐입니다. 사는 것이 의미 없고, 살아갈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선지자랍시고 찾아와 기껏 한다는 말이 축복의 기도나 위로의 말씀도 아니고, 마치 맡겨둔 것을 내어 놓으라는 듯 행동하니 얼마나 기가 막히고 막막했을까요? 그래서 만약 이 여인이 ‘나 먹고 살기에도 부족하다’며 엘리야의 말을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그 여인이 말한 대로, 마지막 한 끼는 먹었을지 몰라도, 그 다음은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죽음 말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인 엘리야만 먹여 살리시려고 불쌍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의 마지막 먹거리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아무 보호자 없는 이 여인을 살리시고 보호하시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를 살리시려고, 엘리야를 사르밧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남다른 복은 남다른 헌신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인생 문제에 치여 죽을 지경인데 교회 오면 매번 예배, 교육, 전도, 선교, 봉사만 이야기하고 있어서 마음이 상하십니까? 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 교회 왔는데 설교는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아 듣기 싫으십니까? 그래서 내 마음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교회를 찾아 혹시 매 번 철새처럼 옮겨 다니셨습니까? 어쩌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라고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만 살아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생각과 행하심이 내 삶에 개입될 여지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왜 예수 믿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내 능력, 내 상식 이상의 하나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남다른 복을 주시기 위해 남다른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복을 주시기 위해, 특별한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말이 아니라 순종하는 행동으로 그 믿음이 검증됩니다.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엘리야나 과부 모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엘리야의 순종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한 여인을 살렸고, 철없는 아이를 살렸고, 한 가정을 살렸습니다. 홀로 된 여인의 순종은 선지자 엘리야를 살렸고, 아이도 살렸고, 자기 인생도 살렸습니다! 홀로 된 여인과 엘리야가 순종을 통해 서로를 살렸듯이, 우리도 서로에게 기적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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