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영 목사(동행교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자신을 발견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4)

▲ 김일영 목사(동행교회)

지난 주간에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기본적인 검사 외에도 초음파를 통해 주요 장기의 건강상태를 점검받았습니다. 좀 더 세밀한 검진을 위해 사람들은 CT촬영이나 MRI검사를 받기도 합니다. 내 몸인데도 불구하고 몸 속의 상태를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첨단 의료기기에 의존하여 자신의 몸 속을 살피는 것입니다.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이런 생각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육체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듯이,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도 자주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체적 건강상태를 검진하기 위해 첨단 의료기기의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의 영적 건강상태의 점검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씀과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날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 나 자신을 비춰봐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겸허히 기도하는 가운데 나의 영적인 상태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경건지수는 어떠할까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경건하게 살고 있을까요? 나의 사랑지수는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의 온도가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을까요? 나의 겸손지수는 어떠할까요? 혹시 내 힘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 가운데 살아온 삶인데, 그렇다면 나의 감사지수는 얼마나 될까요? 감사의 달에 우리 자신의 감사지수도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시금 말씀 앞에 섭시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참된 나 자신을 발견합시다. 그런 측면에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우리를 성찰하고 참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유익한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의 자아도취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에서 그가 어떤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인으로서 그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토색, 불의, 간음 같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11절). 종교인으로서 그는 대단한 열심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12절).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훌륭한 신자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의 마음이 온통 교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있는 세리를 경멸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혼자만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 앞에 거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부르고 있고(11절 상), 감사를 표시하고 있지만(11절 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치레일 뿐, 실제로는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도취에 빠져 하나님 앞에 일장연설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자기 행위를 자랑하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그렇게 자신만만할까요?

바리새인은 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는 자기의 참 모습을 비교를 통해 찾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의 의를 외적인 행위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잣대로 생각해 보니, 토색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자들보다는 훨씬 더 의롭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고 하는 시도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코 참된 자기발견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자기 허상에 빠지고 자아도취에 빠질 뿐입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자기 발견의 표준을 외적인 것에 두었습니다. 남들과 교육수준이나 생활수준을 비교하여 우쭐해 합니다. 타인의 허물을 비난하는 도덕적 오만과 종교적 열심을 빙자한 우월의식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자기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혹시 우리도 이 바리새인처럼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요? 목회현장에서 뭔가를 이루었다고, 사업장에서 뭔가를 일구었다고 하여 그것이 자신의 업적인 양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모든 것은 한낱 물거품에 불과한 것을 잊고, 어리석게 자아도취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롬 3:20).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이유도 누구든지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엡 2:9). 그런데 가소롭게도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자기 모습을 망각하고 자기 힘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이런 어리석은 모습은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자아상실증 환자요, 영적 치매 환자의 모습입니다.

세리의 자기발견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한 바리새인과는 달리 세리는 기도할 때에 매우 겸손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그 당시 죄인들의 대명사로 불리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며, 대중들로부터 지탄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세리들은 자신들의 수입을 위해 세금징수를 빙자한 토색을 많이 했습니다. 거짓이나 협박으로 타인의 재물을 후려내는 세리는 어느 면으로 보든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세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고, 이것이 오히려 자기발견을 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리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엄청난 죄인인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에게 어느 날 기자가 물었습니다. “박사님의 수많은 발견 중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주저없이 대답했습니다. “네, 제가 크나큰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자기발견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한 세리는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자세를 취했습니까? 그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13절). 자신의 허물진 모습을 생각할 때에 그는 너무 부끄러워서 감히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답답하여 그저 가슴을 칠뿐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그는 행동이나 고백을 통해 죄인인 것을 겸손하면서도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기발견을 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엇을 호소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간곡히 기도했습니다(13절). 눈물을 뿌리며 통회 자복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죄인인 것을 발견한 인생은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울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기 행위에서 내세울 수 있는 의가 없기 때문에, 다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평가하기에는 어느 면으로 보나 바리새인이 더 의롭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의 외적인 생활로 볼 때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크게 흠 잡을 데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당시 죄인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세리는 평가할 만한 가치가 없는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14절 상).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 비유의 결론입니다(14절 하).

왜 주님의 관점과 평가는 이렇게 다른 것일까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해 보십시오(삼상 16:7). 우리 주님께서 그 중심을 꿰뚫어 보셨을 때에 바리새인의 마음은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세리의 마음은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드리러 오실 때에 어떤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약 4:6, 벧전 5:5, 잠 3:34).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똑같이 성전에 올라갔고, 똑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지만, 한 사람은 자아도취에 빠졌고 한 사람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 모두가 진정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주님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겸손히 자신을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어떤 공로도 내세울 것이 없는 허물진 사람들입니다. 다만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한 모습으로 살아왔던 지난 삶을 안타까워하면서, 이제 우리가 세리처럼 가슴치며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즈음은 자신을 성찰하기에 참 좋은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참된 자기를 발견하는 이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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