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설교] 성전의 두 기둥 (대하 3:15~17)
[이 주일의 설교] 성전의 두 기둥 (대하 3:15~17)
  • 기독신문
  • 승인 2018.02.07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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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민 목사(전주드림교회)

신앙의 기초 예수에 두고 야긴과 보아스의 기둥을 세워라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역대하 3:17)

▲ 홍창민 목사(전주드림교회)

이탈리아 서부 피사에 있는 사탑은 현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는 명소입니다. 그동안 이 탑은 계속해서 조금씩 기울어졌지만, 오랫동안 보수공사를 실시하여 이제는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지게 된 것은 부실공사의 결과입니다. 그런 건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건물을 세우는데 있어서 기초공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기둥을 세우는 일입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골조공사를 말합니다. 철근콘크리트가 되었든 철골이 되었든 골조공사가 잘 되어야 그 건물이 튼튼하고 오래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기초나 기둥보다 외형에 더 치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초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외적으로 보기에만 좋으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가리켜 ‘포장문화시대’라고도 말합니다. 대량생산, 대량선전, 대량소비…. 세상은 온통 거창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마치 뿌리 없는 나무처럼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염려가 됩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에만 기초와 기둥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기초와 기둥이 중요하고, 우리의 가정이나 기업이나 국가도 기초와 기둥이 중요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교회에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러한 기초와 기둥이 있어야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또한 우리 교회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기초와 기둥은 무엇입니까?

역대하 3장은 솔로몬이 다윗의 유언에 따라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래 다윗은 생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그가 군인으로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짓는 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다윗이었다고는 하지만,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인정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함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하여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대부분의 재료들은 다윗이 준비하여 놓았던 것들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제물로 드려진 다윗의 헌신이었으며, 그러한 다윗의 믿음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은 솔로몬 시대에 훌륭하고 아름답게 건축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솔로몬의 성전이 어디에 세워졌는지 그 기초를 살펴봅시다. 역대하 3장 1절에는 그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솔로몬 성전의 기초는 바로 예루살렘 모리아산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던 바로 그 산입니다.

역대상 21장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인구조사한 일로 인하여 징계를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나타나 7만여 명의 백성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을 치던 여호와의 사자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나타났을 때에 다윗은 백성의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였고,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을 때에 비로소 재앙이 그쳤습니다. 이에 다윗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나타났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금 600세겔을 주고 매입하였는데, 그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바로 솔로몬 성전의 기초가 된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모리아산, 또한 다윗이 번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나타났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성전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곳은 훗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던 갈보리 언덕입니다. 장차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번제물로 드릴 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가 작용한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솔로몬 성전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성전 건축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솔로몬은 성전 앞에 두 개의 큰 기둥을 세웁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여기에서 야긴이라는 이름의 뜻은 ‘저가 세우시리라’는 것이고, 보아스라는 이름의 뜻은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솔로몬의 신앙적인 훌륭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두 기둥을 세우고 하나의 이름은 ‘다윗’이라고, 다른 하나의 이름은 ‘솔로몬’이라고 칭하였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사실 성전 건축에 있어서 가장 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름 아닌 다윗과 솔로몬이 아닙니까? 또한 그들은 보통 사람도 아니고 나라의 왕입니다. 두 기둥을 왕의 이름으로 칭한다고 해서 누구 하나 탓할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이나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세우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하여 솔로몬은 ‘야긴’과 ‘보아스’라는 이름의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야긴과 보아스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과 공적과 의를 드러내지 않는 신앙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신앙입니다. 그분만이 우리 인생을 전능하신 능력으로 세우실 수 있는 분임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인생의 삶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삶을 세울 수 없고 또한 세워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두 기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 기둥들의 임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받치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받치는 기둥들은 많이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받치는 기둥은 바로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놋기둥이었습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은 유지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솔로몬이 성전 앞에 세웠던 두 기둥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당시 빌라델비아교회는 결코 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려운 환란 가운데서도 믿음을 잘 지켰을 때 주님은 빌라델비아교회에게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는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여러 문제에 휩싸여 그 기둥들이 기울어지고 무너지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기둥이 무너진다는 것은 대형 사고를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보이지 않는 성전의 두 기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두 기둥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기둥이야말로 야긴이며 보아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기둥을 세우고 그것을 의지하기 보다는 엉뚱한 기둥을 세우고 그것을 의지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기둥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 번째는 자기 자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또한 자신의 손과 힘으로 무엇인가를 세우고, 이루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스스로 힘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삶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재물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며 그것에 생명을 겁니다.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으면서 사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재물은 가장 큰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약 재물이 우리의 인생을 튼튼하게 세우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면 마땅히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흔들거리게 만들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으로 향하게 한다면 차라리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세상적인 부요함 보다는 차라리 신앙적인 가난함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튼튼하게 세우는 것이라면 그 편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야긴과 보아스의 신앙을 가진 자는 재물을 의지하고 그것에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입니다.

세 번째는 조직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직을 만들어 놓고 자신이 거기에 속함으로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의 인생을 튼튼하게 세울 수 있는 기초나 기둥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조직의 힘을 빌려 자신의 삶을 세우려고 한다면 그 또한 우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절대로 승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조직에 의해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인생의 기초와 기둥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도, 재물도, 조직도 우리가 의뢰하고 의지할 것은 못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세우실 수가 있습니다. 그분만이 능력이 있으십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자기 신앙과 삶 속에, 가정이나 교회에 잘못된 기둥은 과감하게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저가 세우시리라’는 야긴의 기둥과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보아스의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야긴과 보아스의 신앙을 가진 자가 많아질 때에 한국교회는 비전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과 신앙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두고, 그 중심에 야긴과 보아스의 기둥이 자리 잡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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