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 목사(서울비전교회)

‘불가능’과 ‘가능성’의 감옥서 날마다 탈출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신현수 목사(서울비전교회)
신현수 목사(서울비전교회)

신앙은 날마다 탈출을 감행해야 하는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선호합니다. 무언가로부터 구속당하거나 억압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감옥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물리적인 속박을 주는 법적 제도입니다. 신앙인은 외적인 속박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인간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짓누르는 ‘불가능’이라는 감옥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순간순간 낙심하게 만들고, 주어진 상황 앞에서 주저앉게 만드는 불가능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난 더 이상 안 돼!” “난 여기까지야!”라는 불가능의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소중한 하루하루를 흘려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 사회에 우울증 인구가 1000만명을 넘어 섰다는 소식은 우리를 더 우울하게 합니다. 기독청소년 중에 한 번 이상 자살을 생각해본 학생이 40%에 이른다는 통계는 지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 걱정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불가능이라는 무형의 세력이 실체적 위협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그것은 마주한 현실 속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감정, 즉 불가능의 세력이 우리를 거대한 감옥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야구경기에서 9회말 투아웃 상황에서 이뤄지는 짜릿한 역전승에 마치 본인이 실제로 만들어낸 것 같은 희열에 빠져드는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다가 불가능으로부터 탈출한 묘미 때문이 아닐까요?

성경에는 여러 사건과 장면들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단순히 진공 상태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펼쳐졌던 사건이기에 우리에게 피부에 와 닿는 힘과 지혜를 줍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앞둔 장면입니다. 저자 누가는 인류 구속의 역사 현장에 예수님 양 옆에 있었던 두 죄수의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죄를 짓고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것은 더이상 인간으로서는 희망이 없다는 상황이었습니다. 누가는 충분히 절망해도 좋을 상황, 다시 말해 인간적인 불가능의 정점에서 그 불가능으로부터 탈출한 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죄수는 사람의 힘으로 십자가에서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저 사람은 끝났어!”라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제 내 인생은 끝났어!”라는 자기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불가능의 언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을 불가능의 감옥에서 탈출할 길을 제시합니다. 아니, 인간을 불가능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신앙 밖에 없습니다.

이 죄수가 외친 “예수여”(42절)라는 외침은 절망의 끝에서 주저앉지 않게 하는 신앙 언어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수많은 불가능의 늪에서 기진맥진한 영혼들을 향해 전해야 할 유일한 신앙 언어가 바로 “예수여”라는 외침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인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동일한 사건의 현장에 있었고, 같은 예수님을 옆에 두었지만 불가능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한 다른 한 죄수도 주목해 볼만 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불가능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길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사형을 받았으니 내 인생은 좋아질 수 없어!”라는 자신의 인생에 놓은 부정적인 사고의 벽은 이 사람을 탈출하지 못하게 막는 무서운 장벽으로 작용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힘든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회적 어려움은 다른 전문가들에게 맡겨 두고서라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정체와 쇠퇴의 현실은 한없이 우리를 낙담하게 합니다. 수많은 데이터와 전문적인 수준의 통계와 분석은 우리를 더욱 주눅 들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가 참된 신앙의 언어가 우리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와야 할 때라는 영적인 깨달음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국가 차원의 개발과 성장 환경과 맞물려 외적으로 호황을 누려왔습니다. 이제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앞에서 십자가상에서 외쳤던 “예수여”라는 외마디 신앙적 외침을 회복해야 합니다.

초기 교회의 실상을 기록으로 남겨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누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극한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42절)를 믿고, 그 나라를 열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믿음의 후배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좋은 상황이었을 때만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개하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극한 속에서 신앙으로만 열릴 수 있는 나라임을 이 본문을 통해서 누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삶이 주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드는 상황을 신앙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들을 찾아가 당신들이 하는 행위가 신앙적 행위임을 확신시켜주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주일마다 자기 절망을 박차고 교회로 달려오는 심령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는 ‘탈출의 축제’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불가능의 감옥에서 쓰러지지 않고 소망의 탈출을 감행한 성도들이 생명력을 상실한 진부한 종교의 언어가 존재하면 안 됩니다. 생명력 있는 신앙의 언어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도록 축제의 장을 펼쳐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탈출의 위력을 체험한 사람들이 아직도 불가능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료들을 구출하러 나갈 수 있도록 재무장시켜 주는 실제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감옥, 즉 가능성의 감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가능의 감옥에 갇혀 사는 것 못지않게 우리 인간은 ‘가능성의 감옥’이라는 굴레 속에 갇혀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눈에 보이는 교회는 인간적인 가능성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종교라는 성에 갇혀 복음의 최대 장애물이었던 바리새인적 존재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 지 우려를 갖게 하는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에 근거한 가능성은 예수님의 시각에서는 치명적인 위험이라는 것을 바리새인들만 모르고 있었던 2000년 전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교회 안을 살펴야 할 때입니다.(눅 18:14)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구제는 인간의 눈으로 화려하고 멋있는 업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가능성의 감옥으로 존재하게 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이 가져온 하나님의 선물을 포장조차 뜯지 못한 채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역사의 물결에 함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종교 집단들이 걷던 길을 오늘날 우리도 모르게 걸어가고 있지는 않는 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여전히 우리를 오늘의 역사 앞에 참 신앙적 존재로 서 있도록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불가능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한 한 편 죄수, 그리고 인간적 가능성의 감옥으로 탈출하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동일하게 놓친 것은 하나님 나라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은 어쩌면 ‘불가능의 감옥’과 ‘가능성의 감옥’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감옥으로부터 날마다 탈출을 감행해야 하는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그 탈출은 불확실이라는 위험부담을 지불해야 주어질 수 있습니다.

내 앞에 주어진 절망적인 상황에 무릎 꿇어 버리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는 약함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것이 우리내 인생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불가능이 내 인생을 뒤흔들 때도 신앙은 “예수여”를 외칠 수 있는 힘을 제공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종교적인 일이나 행위 때문에 가능성의 감옥에 갇혀 살 때가 있습니다. 이 가능성의 감옥은 불가능의 감옥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능성의 감옥은 우리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수행한 복음 사역에 갇혀 있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던(고전 9:27), 가혹한 행위만이 진정한 탈출에 이르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길이 우리 모두가 걸어야 할 신앙의 오솔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오솔길에서 우리는 ‘탈출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덧 그 한적한 오솔길에서 수많은 종교적 행위와 사역 속에서 들을 수 없었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고 하신 주님의 속삭임을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답답함이 사방으로 우리를 욱겨싸는 현실이만, 우리 각자의 현장이 주님의 복된 은혜가 끊이지 않는 현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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