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설교] 지금 할 수 있는 것, 하라(시 57:6~11)
[이 주일의 설교] 지금 할 수 있는 것, 하라(시 57: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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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1.1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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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석 목사(충정교회)
▲ 옥성석 목사(충정교회)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면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언젠가 광주시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세 아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방 안에 있던 스물두 살의 엄마는 구조가 되었지만 다섯 살, 세 살, 두 살의 아이들은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화재가 난 곳의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엄마에 대해서 “일부러 불을 지르고 아이들이 불에 타는 것을 내버려둘 사람이 아니다”라고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그 사건을 방화로 결론짓고 아이 엄마를 구속했습니다.

당시 이 가정은 서서히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며 실직자로 전락했습니다. 그래도 이 어린 엄마는 악착같았습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날품팔이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월세는커녕 관리비조차도 내지 못했고 전기마저도 끊겼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세 자녀를 둔 스물세 살의 남편은 이혼을 요구해 왔습니다. 화재가 날 당시는 법적으로 이혼이 된 상태였는데, 그날 밤 남편은 게임을 하러 PC방으로 갔고 아내는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PC방에 있는 남편에게 “죽고 싶다”, “나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야” 등의 메시지를 보내는 등 수차례 걸쳐 호소를 했습니다. 하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에 아이 엄마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습니다. 이불 위에 둔 담배꽁초는 화재로 번져갔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세 아이는 그렇게 꽃도 피우지 못한 채 꺾이고 말았습니다. 어린 부모, 준비되지 않은 출산, 실업, 가난, 고립, 술과 담배, 게임중독 등 아이 엄마는 이런 위험 요소들을 삶 속에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벼랑 끝에 내몰리는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냉소적 이성’(zynische vernuft)의 산물이라고 부릅니다. 냉소적 이성이란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행동을 신뢰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살지도 않는 심리상태를 말합니다. 냉소적 이성의 소유자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면서 타인과 세상을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시키며 결국에는 세상을 끝내려 합니다. 이제 성경을 봅시다.

본문에서 당시 다윗의 심리상태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시 57:6)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시 57:7)

그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가 정예군사 3000명을 이끌고 굴 어귀까지 당도해 다윗을 포위한 상태입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너무 ‘억울하다’고 토로합니다. 그러고는 ‘확정되었고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다윗의 당시 마음이 심각하게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심각한 고민을 합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은 이렇게 마음을 다잡습니다. ‘지금 나는 탄식과 원망, 냉소가 터져 나올 수밖에 상황에 던져졌지만, 그래서 인생을 끝내버리고 싶지만, 이 캄캄한 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굴 속에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가요?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57:9)

그는 찬양과 감사를 드리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세요. 7절과 9절 사이, 즉 8절을 주목합시다. 8절에서 다윗은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고 합니다. 새벽은 누군가 깨워야만 비로소 오는 것일까요? 새벽이 깨워지는 것일까요? 새벽이 오는 것, 어둠이 가시고 날이 밝아지는 것은 불변의 창조 질서입니다. 그 누구도 새벽을 막을 수도 없고, 빨리 오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벽’을 깨우겠다는 것일까요?

다윗은 지금 영적 세계를 논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져가는 자신의 상태를 밤으로 묘사합니다. 고난이 닥치는 등 애매하고 어려운 환경에 내몰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영이 어두워지고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았고, 찬양이 입술에서 사라지며, 감사라는 단어는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영적 상태로 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렇게 영이 어두워지면 어느 틈엔가 어둠의 세력이 들어와 심령에 가라지를 뿌리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 13:25) 이 어둠의 세력이 굴속에 쭈그려 앉아있는 다윗에게도 여지없이 찾아왔습니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시 57:4) 급기야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이런 상황 가운데 다윗은 결심을 합니다. ‘내 영혼’(1절), ‘내 영혼’(6절), ‘내 마음’(7절), ‘내 영광’(8절), ‘비파야 수금아’(8절)는 그 결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굴속에 ‘비파와 수금’이 있었을까요? 그러므로 비파와 수금을 가리키기 보다는 자신의 몸을 가장 훌륭한 악기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전인격을 동원하여 어두워진 영을 깨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바울의 경고대로 혼신의 힘을 쏟아 대적해야 할 어둠의 세력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 사실을 인지한 다윗은 마음을 확정하고, 또 확정합니다. 온 힘을 다하여 새벽을 깨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영적 새벽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찬양과 노래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이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너무나 비참하고 처참한 하루하루였습니다. 생을 끝내고 싶은 생각이 수없이 들어왔다 나갔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곁에 다가가 그분의 옷깃을 만지는 것이었습니다.(눅 8:44) 그 여인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요? “여자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8:48) 그때 그 현장에 병든 자들이 이 여인뿐이었을까요?

풍랑이 거칠게 이는 바다 위에서 베드로는 죽을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저 쪽에서 한 분이 말씀하십니다. “오라!” 그 말씀에 베드로는 배 밖으로 한 발을 내딛었습니다. 한 발을 내딛는 바로 그것, 영을 깨우는 것이자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때 ‘오라’는 음성을 베드로만 들었을까요?

자연의 새벽은 절로 옵니다. 하지만 영의 새벽은 절대로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깨우지 않으면 점점 더 캄캄해집니다. 그러므로 깨워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자주 자신의 영을 깨웠습니다. 낙심하고 불안에 떨 때마다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깨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절했던 저항시인 윤동주. 그는 1941년 5월 ‘새벽이 올 때까지’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게외다

이 시의 핵심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것이다. 버틸수록 강해지는 것, 몸의 근육만은 아닙니다. 힘든 시간을 버티면 상황은 불변해도 적어도 더 나은 인간은 될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희망적 메시지입니까. 삶이 아무리 우리를 힘들게 하고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달콤하게 들려올 때에도 버텨야 하는, 아니 버티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너끈히 버텨낼 수 있는 자산입니다.

지금 어떤 상황인가요? 누구에게, 무엇에, 둘러싸여 있는가요? 새로운 한 해를 열어가는 바로 지금 나의 새벽을 깨워야 합니다. 찬양, 감사, 손, 발, 눈으로 내 영을 깨워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에 하나님이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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