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석 목사(충정교회)

‘한 사람’과 ‘그 교회’ 찾고 계신 하나님 향해 나아갑시다

▲ 옥성석 목사(충정교회)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수 18:6)


제네시스 쿠페란 스포츠카가 있습니다. 2008년 10월 정통 스포츠카를 표방하며 처음 출시되자 첫 달에만 1000대가 팔렸었죠. 다음해에는 스포츠카의 판매량이라고는 믿기는 않는 7011대로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쿠페의 황금기는 길지 않았습니다. 불과 2년 후인 2010년에 전년대비 무려 251%나 급감한 2789대로 추락하더니 다음해엔 1568대, 그 다음해엔 1262대로 하향곡선을 그리다 급기야는 한 해에 19대를 판매하는 실적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호(號)는 어떠할까요? 산업화의 결실을 맛보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30여 년은 유사 이래 가장 잘 먹고 잘 산 민족사의 황금기였습니다. 한국의 지위는 어느 때보다 높았고 주변국들과의 관계 또한 대등했습니다. 중국·일본·러시아를 만만하게 본 적이 고구려 이후 1500년간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요? 물론 격랑의 발원지는 중국입니다.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이 언급한 ‘중국 방안’(中國 方案·Chinese Solutions)은 국제사회에 새 질서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AIIB와 일대일로(一帶一路)는 그 의지의 실천이었습니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바꾸려는 중국의 ‘현상 변경’ 전략은 필연적으로 한국을 미국의 품에서 떼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두 대국(大國)이 일으키는 격랑 속에서 한국은 샌드위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정녕 황금기는 저물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정황 가운데 2019년을 맞은 우리에게 오늘 본문이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큽니다. 길갈은 한때 정말 잘 나갔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지가 길갈이었기에, 길갈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수 4:19~20)

길갈에는 기념비적인 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최고의 건축물들이 우뚝 세워졌다는 뜻이죠.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수 5:10)

중요한 행사들과 최고의 잔치는 언제나 길갈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수 14:6)

가나안땅 정복을 마친 백성들이 땅을 분배하는 민감하고 중요한 일을 길갈에서 했습니다. 이같이 당시 모든 것의 중심지는 길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막(법궤)은 어디에 세워졌을까요? 당연히 길갈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수 18:1)

‘실로’라는 무척 생소한 지명이 등장합니다. 실로는 예루살렘 북방 30km, 그리심산과 에발이 있던 세겜으로부터 남방 19km 지점에 있었던 외진 곳입니다. 사람들이 뜸한 곳입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곳도 아닙니다. 길갈과 비교할 때 실로는 그렇고 그런 장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온 회중’이 회막을 세웠습니다. 의외의 사건입니다. 이는 길갈을 찾던 사람들이 이제 어디를 찾는다는 뜻인가요? 길갈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이제 어디를 중요하게 생각한단 뜻인가요? 실로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자주 언급되던 길갈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잊어진 지명이 되어 버립니다. 잠시 각광을 받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런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요?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호 9:15)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암 4:4)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암 5:5)

길갈은 죄악의 온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길갈을 즐겨 찾던 백성들은 어떠했나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수 18:3)

그들은 사명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7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렘 7:12)

그들은 사명을 잊어버리고 지체할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여지없이 법궤를 다시 다윗성, 곧 예루살렘으로 옮겨 버리십니다.(삼하 6:15~16) 그 이후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탄생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무게중심은 안디옥으로, 다시 로마로, 저 유럽교회로, 미국교회로, 그리고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 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100여 년 전, 이 조선 땅에 혜성같이 등장한 기독교는 참으로 신선하고 매력적이었습니다. 비록 숫자가 많지는 않았으나 민중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3·1운동의 주동자로 간주돼 일제검찰에 송치(피검)된 자들 중 기독교인은 51.2%를 차지했으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인이 16명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3·1운동의 핵심이었음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길선주, 주기철, 김병조, 양전배, 조만식, 백낙준, 박형룡, 한상동 등이 키를 잡은 ‘거룩한 무리’는 한결같이 세상을 향해 은혜의 충격파를 던졌습니다. 그 뒤를 이어받은 한경직, 김창인, 김준곤 등이 주역이었을 때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1200만 성도’ ‘민족복음화’란 당찬 외침에 당장이라도 이 한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며, 전 국민이 크리스천이 될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30년,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요? 도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요?

서울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예배에 10만 여명이 운집했습니다. 진정 축제가 되어야 할 현장에서 단상에 선 한 설교자의 입에서는 온통 재를 뿌려버리는 듯한 메시지가 터져 나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데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느니라. 성경학자들은 사데교회가 한 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중략)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에 비친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행위가 죽어 있었습니다.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하략)”

그날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피를 토하듯이 눈물을 쏟으며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울부짖으며 설교를 끝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내다본 탄식이었을까요? 한국교회에 머물고 있던 무게중심,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내다보는 안타까움의 회개는 아니었을까요?

동일한 음성이 지금 실로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지체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이어갑니다.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수 18:4)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오라”(수 18:6)

여호수아가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다’입니다. 이 단어는 ‘카타브’로서, 다른 곳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원래 뜻은 ‘새기다’ ‘몸에 (문신을)새기다’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마음에 품고 간직하는 것, 꿈을 품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본문 18장에서는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나, ‘그리다’보다 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돌아오다’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붙잡고 최선을 다하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영적 무게중심이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저울을 들고 ‘메네 메네 데겔’하십니다.(단 5:27)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롬 13:11) 하나님은 사람,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사람과 교회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십니다.(마 3:9)

그 하나님이 ‘한 사람’과 ‘그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섭시다. 다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갑시다. 그래서 2019년이 다시금 초대교회의 영광, 아니 초대 한국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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