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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종교개혁을 다시 반추하며 (롬 1:17)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오직 교세’보다 ‘오직 성경의 진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 권성수 목사
(대구동신교회)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의 ‘의(義)’라는 단어를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로 보면서 개인적인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의’가 헬라어로는 ‘의롭게 만들다’고 할 때의 ‘의’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의롭다고 간주하다, 의롭다고 인정하다, 의롭다고 선언하다’고 할 때의 ‘의’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종전에 라틴어로 보면서 깨닫지 못했던 것을 헬라어로 보면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의’는 내가 공로를 쌓아서 이룬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무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노력하고 행함으로 이루는 ‘내부적 의’가 아니라, 나는 노력한 것이 없는데도 나의 바깥에서 내게로 오는 ‘외래적 의(justitia alienum, alien righteousness)’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깨닫고 나서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성령으로 거듭났다. 낙원의 문이 활짝 열렸고, 나는 그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루터는 본래 기도와 금식과 고행을 일삼던 수도사였습니다. 밤잠도 자지 않고, 담요도 없이 뼈까지 파고드는 강추위도 견디고, 자기 몸에 채찍을 가하면서 고행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서슬이 시퍼런 진노의 칼날 앞에서 공포에 떨기만 했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의 ‘의’가 내게 관한한 ‘능동적 의’가 아니라 ‘수동적 의’라는 것을 깨달은 후, 루터는 한 편으로는 평화를 누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 교회 상황을 보고 가슴을 쳤습니다. “동전이 헌금함으로 떨어지는 순간 연옥의 영혼이 천국으로 불쑥 솟구친다”고 테쩰이 선전할 때, 루터는 공개적으로 항의하면서 자신의 95개 조항에 대한 공개토론도 요청했습니다. 루터는 1521년 신성로마제국의 찰스5세 황제 앞에서 공개토론을 하러 보름스(Worms) 회의장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그것은 토론이 아니라 루터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재판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루터는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모두 걸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의 증거나 공개적이고 선명하고 분명한 추리의 근거로 제가 교훈과 확신을 얻을 수 없는 한…저는 철회할 수도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안전하지도 지혜롭지도 않기 때문입니다…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달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루터는 성경 진리의 핵심인 ‘칭의’를 깨닫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난 후에는 성경의 진리에 근거하여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회고할 때 우선적으로 두 가지를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 둘째는 성경의 진리를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는가요? ‘꿩 잡는 것이 매다’ ‘우선 먹히는 것이 최고다’는 실용주의가 교계에서 판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가 성장할 수만 있다면 마케팅 이론도 좋고, 경영학 이론도 좋고, 심리학 상담학 처세술 이론도 좋다는 것이 아닌가요? 교인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심리적 복음(psychological Gospel)’으로 매주 평균 5만2000명이 출석하는 미국 최대의 레이크우드교회와 조엘 오스틴을 비판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워하지 않는가요? 초대형 교회 목사님이 나타나면 기자들과 촬영기사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현상을 보면서 ‘크기의 힘’에 내심 감탄하지 않는가요? 오직 ‘교세’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경 ‘진리’에 대한 관심은 어디로 사라졌나요?

루터에게 낙원의 문을 활짝 열어준 ‘칭의’의 진리가 지금 남용되거나 왜곡되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 ‘세상도 즐기면서 쉽게 믿자’는 무늬만 교인들에게는, ‘천국에 턱걸이는 해 놓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편의주의적 반(反)율법주의의 도구로 남용되고 있습니다. 한 번 믿고 구원 받았으니 아무리 죄를 짓고 살아도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방종으로 나가는 것은 반율법주의 오류입니다. 제대로 믿어서 구원을 받았으면 그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믿는다면 결코 마음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벌벌 떨 뿐 아니라 죄를 지으면 철저하게 회개를 합니다. 칭의가 반율법주의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하면서 칭의를 방종의 도구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칭의의 믿음이 ‘언약적 신실성(covenantal faithfulness)’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신실한 믿음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신(新)율법주의의 도구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과거의 칭의’와 ‘현재의 칭의’와 ‘미래의 칭의’를 주장하는 학자도 나왔습니다. ‘과거의 칭의’는 전통적으로 ‘칭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칭의’는 전통적으로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칭의’는 칭의가 최후심판에서 판가름 난다는 것입니다. 최후심판 때 가서야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면, 구원의 확신이 약화되거나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칭의가 이런 식으로 신율법주의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칭의로 받는 ‘믿음’을 우리의 공로로 끌고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반율법주의적 칭의 이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의 진리를 ‘도덕적 해이’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남용하고 있습니다. 신율법주의적 칭의 이해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할 때의 ‘믿음’이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믿음의 ‘공로’를 강조하여 행위 구원으로 가는 중간다리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칭의가 반율법주의나 신율법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직 성경,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란 종교개혁의 ‘5대 오직 진리’가 최근 반율법주의나 신율법주의로 오남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진리’는 무시하고 ‘오직 교세’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교세 확장을 위해서는 비성경적인 ‘비(非)진리’도 가리지 않고 일단 써먹어 보자는 식이 되고 있는 상황이 통탄스럽지 않은가요?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성경의 진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지켜야 할 성경의 진리는 동성애 합법화 반대, 이단 척결, 전투적 이슬람 포교 반대, 기독교 신앙의 헌법적 ‘자유’ 수호 등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동성애에 대해 살펴봅시다. 동성애는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하고 개인과 가정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심각한 죄악입니다. ‘동성애만 죄냐?’는 반론도 있지만, 동성애 찬반은 지금 영적 전투의 최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육박전입니다. 동성애는 소돔 고모라 문명과 로마 문명과 인류 문명이 파멸로 돌진할 때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동성애는 바로 수술해서 제거해야 할 치명적 ‘말기 암’입니다.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 브레인으로 활동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정훈 교수는 우리 사회를 ‘동성애 합법화→전도 금지→성경 금서→기독교 박멸’로 끌고 가는 반(反)기독 세력의 흐름을 간파하고 경고하는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강의에 동의하면서도 교회로 돌아가면 전혀 행동하지 않고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는 것이 통탄스럽다고 했습니다.

지난 6월 대구에서 반(反)동성애 캠페인에 동참한 사람들이 줄잡아 5000명 정도 됩니다. 반동성애 캠페인에 참가한 분들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지만, 참가하지 않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타지역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반동성애라는 둑이 무너지면 기독교 신앙의 자유라는 것이 매몰되고 말 텐데도,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 성도들을 볼 때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신앙의 자유를 상실할 뿐 아니라 신앙 때문에 박해받을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당장 나만 편하면 된다면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후에 아무리 가슴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1주년을 맞이하여 ‘교세’보다 ‘진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 ‘각성’과 성경의 진리를 사수하는 ‘행동’에 인생을 걸 수 있는 ‘골든타임’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후손을 위해 종교개혁의 유산으로 넘겨받은 ‘성경적 진리’에 근거한 ‘신앙의 자유’ 사수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신문 ekd@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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