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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염려하는 인생 (마 6:25~34)맹일형 목사(왕십리교회)

믿음이 있으면 언제나 희망,
‘신령한 염려’를 갈망합시다

▲ 맹일형 목사(왕십리교회)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4)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보면 항상 염려를 안고 살아야 할 요소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북미관계, 살얼음판 같이 항상 불안한 남북관계, 혼란스러운 지방선거가 그렇습니다. 물가는 치솟고, 경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질 않고, 백년지계로 세워나가야 할 교육문제는 계속 난제로 남아 있는 현실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염려가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숱한 염려 가운데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잊고 있는 것은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염려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갉아먹는 두 개의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제에 대한 후회요, 다른 하나는 내일에 대한 염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염려한다고 과거가 바뀌거나, 현재가 새로워지거나, 미래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염려는 우리 인체에도 지대한 악영향을 줍니다. 정신분석학자인 포돌스키(Edward Podolsky)가 쓴 소책자 <염려를 중단하고 차라리 개선하라>에 의하면, 염려는 우리 몸의 유익한 인자들을 죽이고 독성 인자들을 높여서 정신질환과 고혈압, 심장병, 위장병 등과 같은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암세포를 죽이는 항암 인자까지 죽여서 각종 암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게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짧은 본문 말씀 속에서 ‘염려’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반복되고 있으며,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3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무려 550번이나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염려가 우리 인간에게 엄청난 폐해를 준다는 단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염려가 주는 폐해

‘염려하다(μεριμνάω)’는 말을 성경원어에서 보면 ‘쪼갠다, 갈라낸다(μρίζω)’는 말과 ‘마음(νοῦς)’이란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염려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고 인격을 분열시킵니다. 염려하면 감정이 상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그대로가 아닌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바로 볼 수가 없고 이성을 분열시키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해야 할 일, 못 할 일의 구별도 못하고, 해야 할 말, 해서는 안 될 말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편한대로 살아갑니다.

영어로는 염려를 ‘worry’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의 어원은 ‘물어뜯는다’, ‘이빨로 목을 물어뜯어 질식시킨다’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염려에 물린 사람은 무력해집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사람은 염려로 인해 서서히 스스로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염려의 도가 깊어지면 자신의 건강을 해치고 수명을 단축시키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의 기능이 마비됩니다. 결국은 영적인 무기력증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염려의 폐해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염려는 전염성이 대단히 강합니다. 염려는 전염병보다 전염이 더 잘됩니다. 염려하는 사람과 자주 만나고 같이 지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려라는 병에 전염이 됩니다. 때로는 염려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얼굴만 쳐다봐도 염려가 옮겨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염려는 유해하고, 전염성이 강한 무서운 질병입니다.

문제는 이 험악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삶

오늘 본문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세 번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관찰하면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나타나는 25절, 31절, 34절이 한결같이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즉, ‘그러므로~염려하지 말라’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 하나에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과 능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이미 선택과 결론이 내려졌으므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정의를 이해하고 25절의 ‘그러므로’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그러므로’는 24절과 연관이 되어 ‘그러므로…너희는 염려하지 말라’로 연결됩니다. ‘이미 선택과 결론이 내려졌으므로’라는 ‘그러므로’의 정의와 연결해 본다면 이런 뜻이 됩니다. “재물과 하나님,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너희는 이미 하나님 쪽으로 선택과 결론이 내려졌으므로 이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행복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신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편으로 선택이 끝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걱정거리를 만나도 좌절하지 않고, 위기를 당해도 동요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 실례로 주님은 ‘공중의 새’(26절)를 비유로 들어, 그런 새들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의 삶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삶

두 번째 31절의 ‘그러므로’는 앞의 28절 이하의 말씀과 연관됩니다. 하찮은 ‘들의 백합화’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녀된 너희의 필요를 채워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1~32절)란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주부들은 당장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림을 안 해 보셔서 그렇지. 하루를 지내면서도 뭘 먹을까, 뭘 입을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걱정거리인데….” 사실 인간에게 의식주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해결해 보겠다고 온종일 뛰어 다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필요를 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의 중점적인 내용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단지 육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식의 기도는 믿지 않는 자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의식주 문제에 집착하다보면 영적인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결국 그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초라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적인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염려들을 다 거두시고 영적인 만족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의 용사 조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는 말했습니다.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다. 너희가 염려하느냐, 너희 믿음이 죽을 것이다. 너희가 믿음을 추구하느냐, 너희 염려가 죽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염려를 맡기고 믿음과 평안을 얻는 기쁨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염려를 평강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염려로부터 믿음으로

세 번째 34절의 ‘그러므로’는 우선순위의 문제를 말합니다. 우리의 필요도 구해야 하지만 33절을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말씀하시다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34절)고 결론을 맺으십니다.

이 본문에서 주님은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염려의 주어가 달라집니다. 염려를 하더라도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할 것이니 너희는 평안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소급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내일은 언제나 절망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내일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여기에 염려를 십자가 앞에 맡기고 믿음을 얻게 되는 신비가 있습니다.

이 변화를 통하여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수없이 급한 일들이 내게 횡포를 부립니다. 긴급한 일들이 다 중요한 일은 아닌데, 늘 이 급한 일에 쫓겨 중요한 일을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 염려를 신령한 염려로 바꾸었다면 우리가 할 신령한 염려가 무엇입니까? 33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염려꺼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늘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던 사람이 어떻게 하면 좀 더 정결하게, 좀 더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를 염려하게 됩니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던 사람이 이제 성령에 목이 말라 헐떡이게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 갈급하여 몸부림하게 됩니다. 기도의 갈증, 말씀의 배고픔, 심령의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갈망, 이러한 것이 성도들이 바라야 할 신령한 염려입니다. 진정으로 우리 모두의 바람이 여기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맹일형 목사 ekd@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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