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애국신앙의 파수꾼 되어 나라 위한 기도 쉬지 맙시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6)

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6월 호국의 달을 맞이하였습니다. 모르도개가 민족의 위기를 에스더에게 알린 것처럼, 모르도개의 심정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애국심’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한 미국 선교사가 본국으로 보낸 선교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에서 야소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애국자가 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야소교인만이 참혹한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은 유일한 조선민이었습니다.”

실례로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절반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 전도사님과 같은 분들이 민족대표 절반을 차지하였습니다. 당시 남북한 인구를 다 합쳐도 2000만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중 기독교인은 20만 내지 30만이었습니다. 2000만 명 중에 20~30만 명이면, 1% 내지 1.5% 밖에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독교인은 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상재 선생님이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할 때였습니다. 일경이 3·1운동을 주동한 배후세력을 대라는 질문에 이상재 선생님은 “하나님이 시키셨다”고 당당하게 말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국내외적으로 불안전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나라를 생각하고 애국을 다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풍전등화와 같은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보여준 태도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1.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십시오

모르드개는 호화로이 왕궁에 머물던 에스더에게 나라가 망하면 혼자 살아남을 수 없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13절) ‘혼자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국사상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는데 어찌 자기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개인주의가 팽배해져서 자기 일이 아니면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자기 일과 직결되는 일이라면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듭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농담이 있겠습니까? 집에 강도가 들었을 때, “강도야!”라고 하면 사람들이 자기 다칠까봐 다 숨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이야!”라고 외쳐야 자기 집까지 불에 탈까봐 나와서 본다고 하니 씁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니다.

1966년 6월 12일 이스라엘이 아랍과 ‘6일전쟁’을 치를 때의 일입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총장이 유대계 학생들과 아랍계 학생들을 모아놓고 당부했습니다. “자네들의 고국에서 전쟁이 발발했지만 동요하지 말고 다가오는 학기말 시험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네.” 며칠이 지나 유대인 학생들이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 학생들은 “고국에 전쟁이 났는데 편안하게 공부만 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하면서, 나라를 위해 고국으로 짐을 싸들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반면에 아랍계 학생들은 본국으로부터 차출 명령을 받을까봐 무서워서 다 은신해 버렸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300만도 안 되는 이스라엘이 1억이 넘는 아랍과 싸워 당당히 승리하였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유대인의 정신력, 즉 애국심에 의해서 결판이 난 것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단어는 귀족의 의무 또는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합니다. 이 말은 원래 로마시대에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많은 특권과 부와 혜택을 누렸습니다. 사회적 신분과 지위가 보장되었습니다. 한번 귀족이 되면 평생 귀족으로 살았습니다. 그 자녀도 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귀족들은 다른 국가의 귀족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전방에서 가장 앞장서서 싸우는 사람들이 귀족들과 그 자녀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귀족은 특권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귀족으로서 책임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도 특별한 신분을 가지고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고 삽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요,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 비하면 많은 특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만 잘되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 나라는 망할지라도, 나와 내 가족만 잘 되면 돼”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누구보다도 나라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2. 자기 자리를 잘 지키십시오

어느 사회학자가 오늘날의 시대를 가리켜서 ‘도망가는 세대’(runaway generation)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본분과 역할을 망각하는 현대인들의 특성을 빗대서 한 말입니다.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자신이 할 일은 다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떠나서 다른 사람들을 참견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나라사랑은 각자의 사명을 자각하고,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답게, 고용주는 고용주답게, 근로자는 근로자답게, 교사는 교사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목사는 목사답게, 성도는 성도답게, 자기 자리에서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에스더의 안일한 개인주의를 질타한 모르도개는 그녀에게 시대적 사명감을 일깨워주는 말을 합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14절) 다시 말하면 “네가 왕후의 자리에 올라간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민족을 위기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너의 사명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요? 바로 ‘민족복음화’입니다. 우리나라가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되도록 힘써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심판하시는 경우는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복을 받는 비결은 우상을 버리고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꿈을 꾸면서 민족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찰서 한 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10개를 세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요, 대안입니다. 정의의 보루이며, 정신적 지주이고 시대의 양심입니다. 우리는 단지 자기 예배당 좌석을 채우기 위해 전도해서는 안 됩니다.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사명이요, 민족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3. 나라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에스더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자 드디어 용기가 생겼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라를 살리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이와 같이 사명을 깨닫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때 에스더는 자기 민족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자신도 금식기도에 들어갑니다.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15~16절)

에스더의 결단을 계기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백성이 있는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나라를 보호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사실은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등장합니다. 아하수에로왕이 자신의 조서를 취소하고, 대신 음모를 꾸미던 이스라엘의 대적 하만을 나무에 매달아 죽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말미암은 섭리였던 것입니다.

기도는 파수꾼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파수꾼은 망대에 올라 깨어서 나라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들에게 이 나라의 운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를 책임지는 것은 청와대가 아닙니다. 국방부도 아닙니다. 기도하는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나라의 번영과 안전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자기 나라를 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수많은 고비와 위기를 잘 넘기면서 이만큼 성장한 것은 애국가가 좋아서 덕을 보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를 보면, 찬송가 14장이 애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선배들은 예배시간에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에 ‘하나님’이 나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국가에 이런 가사를 가진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애국가 자체가 기도문인 참 특별한 나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나라를 보호해달라고 기도하는 민족이니, 어찌 잘 되지 않겠습니까.

6월을 맞이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사랑을 다시금 마음속에 새깁시다. 애국도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애국자여야 합니다. 망국적인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자기 자리를 떠나지 말고 사명을 잘 감당합시다. 무엇보다도 파수꾼이 되어 나라를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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