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지난 10월, 25살 ‘설리’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우울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나 되었다. 어두운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처럼 가슴 아파했다. 그런데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1월에는 29살 ‘구하라’의 슬픈 소식을 접했다.

그들의 죽음을 편한 말로 우울증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그 우울함은 누가 안긴 것일까? 그것이 우리 사회의 민얼굴일지 모른다. 남이 잘되는 꼴(?)을 보기 힘들어 하는 사회상, 조금만 흠을 보이면 후벼 파고 아픔을 확대 재생산해내는 능력을 과시하는 우리들의 얼굴. 귀엽게 보고, 실수했다 싶고 비위를 상하게 해도 예쁘게 봐주는 너그러운 눈은 완전히 잃었는지.

현미경으로 보듯 샅샅이 뒤져 세밀하게 또 크게 들여다보기에 익숙해진 우리 사회. 나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뭘 바라는 것도 아닌 관계. 멀리 있어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줌인’에 익숙한 우리 사회는 기어코 가까이 끌어들여 보고 만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흠씬 두들겨 패주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모양이다. 그러다 죽으면 누가 죽으라고 했냐는 등 자비라곤 찾기 힘든 냉소에 빠지곤 한다.

국회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설리법’이 발의되고 영어전문가임에도 악플을 몰아내자며 ‘민병철선플재단’을 만들어도 그때 뿐, 곧 차가운 겨울바람 앞에 날아가 버린다.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해 보이는 여인마저 주님께서는 정죄조차 하지 않은 채 미래를 열어 주셨다. 그런데 이 세상은 여전히 손에 쥔 돌을 누구에게 던져야 한이 풀릴지 그 대상을 찾아다니는 것 같아 슬프다.

이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럼 교회는 과연 다를까? 교회 안에서조차 흠집 내고 뒷담화하고 서슬이 퍼런 독이 담긴 말로 누군가를 죽인다. 온기라곤 찾아보기 힘든 차가운 말이 누군가의 가슴을 후벼파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아플지는 생각 못하는 무감각에 익숙하다.

‘진리’, 설리의 본명이다. ‘진리’가 죽고 ‘구하라’가 죽어감에도 진리를 따르며 세상을 구하는 것이 사명인 교회가 꿈쩍도 하지 않는 듯하다.

이런 글을 쓰는 나 역시 이런 아픈 일에 관심조차 주지 못했으니 방관자로서 책임은 어떻게 져야 할지 모르겠다. 난 과연 그렇게 반복되는 아픔을 느끼고 눈물을 흘려봤는지, 기도라도 해봤는지 생각하니 이 글은 ‘악플 공화국’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반성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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