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음악의 역사를 바꾼 작곡가 베토벤, 그는 음악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베토벤 이전의 음악은, 좀 과하게 말하자면 ‘주문 생산’ 추세였다. 왕과 귀족들이 원하는 음악을 만들고 교회가 주문한 곡을 생산했다. 결혼식과 장례식 그리고 좀 고급스럽다면 미사를 위한 주문에 적절한 작품을 썼다. 지금은 아름답게 들리는 선율들도 당시는 귀족들의 파티나 사교행사의 배경음악 정도였다. 작곡가는 그렇게 곡을 썼고 연주자들은 파티 자리에 앉은 이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던 음악이 베토벤에 의해 바뀌었다. 그는 순수하게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들이 연주장으로 찾아오게 했다. 음악을 듣고 즐기고 싶어 찾는 이들을 위한 진정한 작품을 만들었다. 전과 다르게 작품 번호(op. No)도 직접 부여했다. 다른 음악들이 후대에 붙여진 것과 다른 점이다. 베토벤은 귀를 즐겁게 하는 곡이 아닌 작품으로서 곡들을 만들었고 그러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연주 직전까지도 영감이 떠오르면 몇 번이고 바꿨다. 그러기에 그의 교향곡 작품 수가 비교적 많지 않다. 또 지금은 이해를 못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을 그런 작품을 만들었다. 온전히 음악만을 듣고 즐기기 원하는 사람들이 연주회장을 찾게 만든 것이다.

그는 음악가로서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 귀가 들리지 않을 때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 때 쓴 <비창>, <월광> 등은 피아노곡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합창>이라는 이름을 붙인 교향곡 9번으로는 청중들을 열광하게 했다. 베토벤은 이렇게 대중이 감동받을 공공음악의 길을 연 것이다.

베토벤을 보면서 나를 돌아본다. 난 과연 설교를 설교로 만들고 있는지. 모든 힘을 쏟아 부은 진정한 작품과 같은 그런 설교인지. 요즘 주문에 맞춘 설교가 많다는 이 느낌은 무엇일까? 비록 직접 주문을 받지는 않았어도 들을 자들의 관심과 의중에 맞춘 것은 아닌지. 그들의 간지러운 귀를 시원하게 해줄 설교가 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베토벤 앞에서 반성해본다. 좋은 설교라는 것이 많은 사람을 모으는 기술의 결과는 아닌지.

주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듣고 싶은 설교를 하시지 않았고 스데반 역시 그랬다. 그래서 죽을지언정 그렇게 그들이 꼭 들어야 할 말씀을 선포했다. 나도 주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을 깨우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듣기 싫고 이해되지 않는 말씀도 외쳐야겠다. 세상은 그런 말씀으로 바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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