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지켜야 할 선(線)이 많은 세상이다. 자동차든 비행기든 배든 지켜야 할 생명선이 있다. 차선 또는 항로라고도 한다. 이런 선을 지키지 않으면 나뿐 아니라 누군가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국경선이 있다. 넘어가면 불법이다. 그래도 넘어오는 사람들이 있기에 미국은 멕시코 국경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 장벽을 쳤다. 그럼에도 그 선을 넘으려는 자들의 필사적 노력 또한 측은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켜야 할 선(線)으로서 예의나 관습 또는 규칙도 있다. 정치인이든 장사를 하는 사람이든 반드시 지킬 선이 있는 것이다. 그 선을 넘으면 세상은 무질서 내지 싸움터가 된다. <기생충>의 영화에서도 박사장은 운전기사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한다. 운전기사가 아슬아슬하지만 선은 넘지 않는다는 대화를 사장 부부가 하기도 하지만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을 넘으면서 비극으로 치닫고 만다.

그래서 ‘공연히 나서지 말자, 선을 넘으면 나만 손해다’라는 생각으로 곁을 주지 않는 일들이 많다. 공연한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며 마땅히 도와주거나 관심을 기울여야 할 타인의 문제에도 선(線)을 지키는 것조차 처세술이고 소신이란다.

그러다가 절대적 선(善)을 놓친다. 때로는 정해진 선, 또는 나의 능력의 선을 뛰어넘어 따듯하게 손 잡아준다면 그것은 선(善)이 된다. 그러다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그런 선은 넘어야 마땅하다. 그런 의미의 선을 종종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닐까. 예수 믿는다면서도 늘 내 교회, 내 자녀에 머물고 싶다. 내 마음에 이미 정해진 선이 있는 모양이다. 손익분기점으로서의 선을 그어놓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주님이라면 관심을 기울이셨을 선(善)에서 멀어진다. 지켜야 할 것은 선(線)이 아니다. 바로 선(善)이다. 때로는 선(線)을 넘어 선(善)을 행해야 한다.

선교사들은 국경, 민족, 언어, 문화라는 선을 넘어 최고의 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이방인이라고 선을 쳐 놓은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 그 선을 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율법의 선을 넘어 진정한 선을 원하시는 주님! 선을 넘어서라도 선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지 않을까. 지켜야 할 선(線)과 넘어야 할 선(線)이 있다. 그것을 분별하면 선(善)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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