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곧 타인이다’(Hell is other people) 사르트르(J.P.Sartre)의 말인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일일까? 견습 수녀로 수도원 생활을 하는 주인공 마리아. 그는 자발적으로 수녀가 되려했지만 수도원의 규범을 지키기란,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라는 강요처럼 느껴져 힘겹다.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살며 갈등하던 그녀는 새로운 환경을 만난다. 오스트리아의 해군대령 트랩의 집에, 일곱 아이들을 돌보는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 곳에서 노래하며 뛰노는 동안 얼굴엔 웃음이, 삶엔 생동감이 넘친다. 비로소 그녀는 ‘나’로 살게 되었고 그래서 행복하다. 그러나 트랩 대령과의 사이에 사랑이 싹트면서 다시 수녀원으로 도망간다. 그렇게 ‘나’를 잃고 다시 ‘타인’으로 돌아온 그녀의 수도원은 지옥과 다르지 않았다. 수도원이 지옥은 아니지만, 타인으로 살아가는 그녀 자신이 지옥을 만든 것이다. 고집스럽고 무서울 것 같은 원장수녀는 그녀의 마음을 읽어낸다. 마리아에게 ‘너의 삶을 찾으라’고 권유하며 대령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결국 그는 ‘나’를 찾아낸다. 트랩 대령과의 사랑에도 성공하여 수녀들의 도움과 축복 속에 결혼한다. 참 멋진 원장수녀고 아름다운 수도원이다. 우리 교회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결혼식을 돕는 수녀들, 마리아를 부러운 듯 바라보는 그녀들의 얼굴. 그들은 과연 ‘나’로 살고 있는 것일까? 혹시 타인으로 사는 데 익숙해져 ‘나’를 영영 잊은 것은 아닌지 싶었다.

그 영화에는 ‘타인’으로 살기를 강요하는 또 다른 스토리가 나온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독일인으로 살도록 압박하는 히틀러. 트랩 대령의 캐슬 같은 집에 사령부를 차린 독일군은 나치스 문장을 벽에 걸지만 트랩은 찢어 버린다. 타인을 거부하고 오스트리안으로 살겠다는 의지는 결연하다. 그 후 독일군 복무 명령을 받지만 ‘나’를 지키려는 트랩은 알프스를 넘는다. 모든 이를 눈물짓게 한 트랩 가족의 마지막 노래 <에델바이스>를 뒤로한 채 힘겹게 높은 산을 넘는 아홉 식구는 행복하다.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기에.

신앙생활, 인생을 값지게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좋은 신앙’에 대한 강박증은 없는지. 진정한 신앙이란 ‘자유함’이다. 하나님께서도 나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신앙인이기를 원하실 것이다. 목회자인 나는, 자유인이어야 할 성도들에게 ‘타인’으로 살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아울러 나 역시 교인들을 의식하며 ‘타인’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현실적 지옥에 던지는 것이리라. 하나님이 주신 ‘나’로 살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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