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얼마 전 세종시 한 아파트의 입주민 대표회의 주민 대표가 사퇴했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이웃한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공지문을 붙인 까닭이다. 아직도 이런 일이 있나 싶어 참 슬프다.

우리! 좋은 대명사다. ‘나와 너’를 ‘우리’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이럴 때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편가르기식 우리일 수 있다. 나를 포함한 내 편만 ‘우리’일 뿐 나의 이익에 반하거나 생각이 다르면 ‘우리’ 속에 끼어주지 못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렇게 배타성을 지닌 ‘우리’는 이기적 욕망의 덩어리일 뿐! ‘우리’라는 따뜻한 대명사를 욕되게 하는 것이리라.

‘나와 너’를 뛰어넘는 우리! 이해관계를 넘어서고 내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우리, 그 우리를 위해서는 기꺼이 내가 좀 손해 볼 수 있는 우리라면 얼마나 건강한 집단일까? 그런 우리가 내게 행복이 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목회하면서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이라는 표현을 많이 듣는다. 참 따뜻하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다니는 교회와 그 목사님에 머무르는 것이라면 이기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나와 너를 뛰어넘어 우리를 이루면 주님도 거기 계시는 법이다. ‘임마누엘’의 뜻이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나에게만 함께 하셔서 너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나를 희생해서 함께 할 수 없는 ‘너’와 우리를 만들 때 진정으로 주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이기적 우리는 주님조차 밀어내고 말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를 이룰 때 조심해야 한다. 교회나 총회 안에도 배타성을 전제로 한 ‘우리’가 있다. 우리만의 천국을 만들고 싶고 우리가 다 갖고 싶은 욕망으로 뭉친 집단이라면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기대는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힘을 모아 교회를 세우고 교단을 든든히 할 수 있는 ‘우리’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우리’가 건강한 우리인지 살펴야 한다. 도대체 난 어떤 ‘우리’에 속했는지? 그리고 나의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을 정해놓은 것은 아닌지? 그런 ‘우리’라면 그 아름다운 ‘우리’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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