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 기생충은 숙주에 기생하여 살아간다. 아주 독한 기생충이 아니라면 숙주의 영양분을 빼앗아 살지언정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는다. 숙주가 죽으면 자기도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그렇지 않을까? 이렇게 기생충으로 살아가지만 공생을 위해 숙주가 계속 살아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없애야 할 기생충조차도 알고 있는 이 평범한 사실을 모르는 것 같은 사람들이 곳곳에 보이는 것은 무슨 일일까?

기생하며 숙주의 영양분을 빼앗아 자기를 키우지만 결국 자기를 살아 있게 하는 그 숙주를 죽이는 것들도 있다. 사람의 몸 안에서 그 사람이 살아있는 덕에 자라지만 그렇게 커져서 자기가 기생하던 몸을 죽이는 악성 암세포가 그런 것이리라. 그래서 주변에 치명적인 상처나 손상을 끼치는 존재를 암적 존재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암세포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 교회와 거룩한 공동체 안에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자들은 교회에서 살고, 예수님 덕에 살아가지만 ‘숙주’ 격인 교회를 헐어버리는 일인 줄 모른 채 헐기도 한다. 극히 적은 수지만, 교회가 무너지면 스스로 존재하기 힘들 텐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총회 같은 연합체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가끔 보인다. 최고의 가치를 지닌 교회라는 숙주에 기대어 공생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교회를 살려야만 나도 사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회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에 기대지 말라.

그러면 왜 그렇게 헐 수 있을까? 숙주가 더 이상 자기 욕망 성취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생각만큼 이익이 되지 않는다 싶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죽일 방법을 찾는다. 은근히 죽이겠다는 암시를 하거나 노골적 협박도 한다.

이들은 숙주에게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적절히 공생하는 것조차 어려운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합리화하는 기술까지 갖췄다. 적절한 명분을 내세우는 것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을 닮은 것일까.

도울 힘이 없어 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지라도, 그것을 고마워하고 또 따뜻하게 웃어 주기만 해도 함께 잘 살아 갈 수 있을 텐데. 아름다운 상생이나 공생은 아닐지언정 고마운 마음으로 기대어 사는 것조차 안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당신 덕에 내가 살아간다며 기대고 있는 사람의 기분이라도 좋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웃이 나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고 또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면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기생충>과 교회 안팎을 보는 중에 이런 마음이 들어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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