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황해도 출신의 안중근은 가톨릭 신자였다. 세례명 토마스, 어머니는 마리아였다. 순국 전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분도 엄마에게”로 되어있다. 그런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교회로부터 외면당했다. 당시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의거 직후, “안중근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그는 천주교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안중근은 물론 그 가족까지 잘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1910년 2월 16일, 사형집행 한 달여 전 일본 검사로부터 면회허락 공문을 받고도 “안중근이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정치적 입장을 밝히지 않는 한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없다”고도 했다. 황해도의 빌렘 주교가 뮈텔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을 면회했다는 이유로 2개월 미사집전금지라는 징계를 받았다. 교회는 그렇게 철저히 그를 버렸다. 프랑스와 일본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프랑스 신부들은 이랬다. 근원적으로는 조선을 동양의 미개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중근에 대한 교회의 배신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세례명 야고보인 사촌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계획하고 빌렘 주교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빌렘은 뮈텔에게 보고했고 일제에 밀고한다. 안명근 체포 후 600여 명이 총독암살미수 관련자로 체포되었고 윤치호, 이승훈, 안창호, 신채호 등이 고문 받고 투옥되는 105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항일비밀결사단체였던 <신민회>는 총독 암살음모 배후로 지목되어 해체됐다. 안명근은 약 15년 옥고를 치른 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옥에서 얻은 병으로 1927년 이국땅에서 48년의 생을 마감한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가톨릭 인사는 왜 한 명도 없는 지, 또 가톨릭 학교들이 만세운동을 한 학생들을 왜 징계했는지 이해된다. 이런 사실들은 당시 선교 및 정치 상황을 기록한 파리에 있는 뮈텔의 일기에서 확인된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듯 어머니 조마리아는 거사 후 아들에게 든든한 격려자였지만 정작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할 교회는 그를 외면하고 정죄했다. 목숨처럼 지켜야 할 고해성사까지 누설해 애국지사를 고통으로 내몰고 민족의 독립을 방해했다. 흉악범죄를 저질렀어도 고해성사 후 안아주어야 할 교회가 어찌 그랬는지 가슴이 아프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떨까? 기대고 싶은 교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따뜻한 어머니 품 같은 교회인가? 내게는 좀 불편해도 “참 장하다” 싶은 교인들을 다독이며 하늘의 상을 확인시켜주는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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