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사람과 돈, 이 세상에서 서로 부딪히기 쉬운 중요한 가치다. 값싼 노동력을 위해 사람의 권리를 짓밟아 온 흑역사는 이미 오래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흑인들이 노예로 대거 유입된 것은 17세기 일, 400년 전이다. 그렇게 흑인들을 통해 돈을 벌어들인 자들이 기독교 문화 속에 살아온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로 인해 자기들의 이익이 커지기를 기도했다. 

인권은 이권에 밀려났다. 흑인은 백인과 다른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을 신앙처럼 가졌고 수많은 흑인을 노예로 부릴 수 있는 것을 감사했고 그것으로 얻는 재물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했으니 이 얼마나 아픈 일인가. 그것이 꼭 400년 전의 모습만은 아니다.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인권은 이권 앞에 고개를 숙이곤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그런 모습이었으니, 교회라도 사람이 재물보다 더 큰 가치는 아닐 수 있다는 역사적 반증이다. 초대교회도 번쩍거리는 옷에 금 액세서리를 장식한 사람을 회당에 환대하고 좋은 자리에도 앉히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야고보서 지적했으니까. 이런 행위는 사람을 보면서도 그가 가진 돈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천박한 가치를 좇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아닌 재물로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야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인권을 짓밟아서라도 이권을 챙길 수 있다 치자. 그러나 교회에도 그런 가치가 은근히 자리 잡는다면 주님이 어떻게 보실까? 그럴 리 있겠나 싶지만 매우 오래된 저변의 흐름이라는 것을 다시 짚어야겠다.

사람과 돈이, 서로 부딪히는 가치가 아닌 사람을 위한 돈, 돈을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권, 이것은 돈과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이권은 사람을 편 가르는 데도 적용된다. 옳고 그름이나 좋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판단하기보다 이해관계를 앞세운다. 나의 정치적 이익에 부합하면 옳지 않아도 내 편을 만든다. 사람이 아닌 이익이 우선이다.

사람을 존중하고 그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정치여야 하는데. 주님조차도 사람을 위해 오셨고 하나님께서도 지금 사람을 위해 역사를 섭리하시는데 우린 정치적 이익만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그럼 난 어떤가? 때때로 인권보다 이권이 우선일 때가 있어 깜짝 놀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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