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교회 공동체 내 공의와 사랑의 균형을 강조했다. 목회하면서 교회 공동체 내 공의와 사랑의 통합을 이뤄내기 위한 진정한 신앙생활의 체험은 무엇일까? 답은 나눔과 섬김이다. 나눔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섬길 수 있다.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나눔과 섬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데 가장 귀중한 가치 중 하나다. 나눔과 섬김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눔과 섬
필자는 지난주 칼럼에서 목회 지도력을 위한 공의와 사랑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건강하게 성도들을 이끌고 섬기기 위해 ‘공의와 사랑의 균형 잡기’가 중요했다는 점을 공유했다. 목회를 하면서 공의와 사랑의 균형을 잘 잡아야 교회 공동체가 화평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부흥과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공의와 사랑의 균형 잡기’를 위해, 교회 내에서 목회자가 가져야 할 공의와 사랑의 원칙은 무엇일까. 이를 바탕으로 교회가 어떻게 지역 사회를 섬기고 부흥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특히 다양한 문제와
필자는 어릴 때 강에서 물놀이하다가 위험한 일을 겪었다. 이후로 물을 무서워했다. 성장하면서 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수영을 배웠다. 나에게는 대단한 도전이었다. 코치에게 수영을 배우는데, 배우는 과정이 복잡하지 않았다.수영을 익히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물속에서 몸의 균형을 잡는 것이다. 아기가 손이나 물건에 의지하지 않고 걷기를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기는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두 발로 몸을 지탱하고 중력에 적응하며 걷는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처음 물에 던져진 몸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중력에
나는 총신신학대학원 3년을 다니면서 장애학생 장학금과 외부 사랑선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거의 매 학기 받았다. 남들처럼 교육전도사 사역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 신학생에게는 정말 가뭄에 단비 같은 장학금이었다. 신대원 생활을 하는 동안 대형교회에서 장학금을 수여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혼자 조용히 기도한 적이 있다. “하나님 저도 장애인 신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이 기도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사이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신대원의 장애인 신학생에게 장학금을
그루터기교회는 오후 3시에 예배를 드린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오후 예배냐, 저녁 예배냐 하고 다시 묻곤 한다. 아니다, 오후 3시에 드리는 예배가 주일 대예배다. 중증장애인들은 혼자서 일어나 씻고 옷을 입고 외출할 수가 없다. 활동지원사가 집에 와서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을 받아야 우리가 휠체어에 앉을 수 있고 외출할 수가 있다. 개인 차이는 있겠으나 보통 외출을 준비하는데 1시간 넘게 걸린다. 활동지원사는 정부에서 급여를 받고 중증장애인의 모든 활동을 돕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첫 예배로 오후 3시에 예배를 드렸다.예배를
나는 평일에 장애인 단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이중직 목사이다. 우리 장애인 단체에서 항상 주장하는 것이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장애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거나 불쌍히 바라볼 대상이 아니다. 장애인이 받는 모든 복지 서비스는 장애인이 누려야 할 당당한 권리다.벌써 30년 넘은 것 같은데, 소위 대형교회에서 장애인 대상으로 한 부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후 우후죽순 격으로 중형교회까지 장애인 부서가 많이 생겼다. 장애인 사역에 경험이 많은 사역자를 특별히 배치하고 그들만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2015년 3월에 첫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개척한 지 3년쯤 됐을 때, 슬럼프가 찾아왔다. 중증장애인의 몸으로 매주 설교하고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를 이끌고 가는 것이 생각보다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생계를 위해 평일에는 장애인 단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주말에 쉬지 못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주일에는 주보 제작, 자리 정돈 등 예배를 섬기는 일이 버겁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몸이 힘들다 보니 점점 교회 개척에 대한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장 난 회의에 빠졌다. 이렇게 혼자 아등바등하며 교회를 이끌고 나가
나는 총신신대원을 입학하면서부터 교회 개척을 생각하고 있었다. 중증장애인이기에 일반 교회에서 사역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대원 3학년 때쯤인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이자 장애인인 임일주 씨가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물었다. “형 신학교 졸업하면 형이 교회 세우면 안 돼요?” “내가 교회를 세워도 되지.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요?”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그는 당시 집 근처 조금 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초심자였다. 그도 중증장애인이기에 엘리베이터 시설이 잘돼 있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이
나는 매주 성도가 10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의 담임목사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교회의 목사에 불과한데 목회 칼럼을 쓰자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부족하지만,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힘을 얻는 목회자나 성도가 있다면 감사할 것 같아서 마음을 잡고 글을 쓴다.먼저 나를 소개하자면, 나는 사지마비 중증장애인이다. 전혀 일어나 걷지 못하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며, 팔도 쓸 수 없어 혼자서는 밥을 먹지도 못한다. 세수도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한다. 물론 연필을 잡고 글을 쓸 수도 없다. 책을 넘길 수도 없어서 항상 누가 책을 넘겨줘야
코로나19가 시작되던 2020년,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탈북민 일꾼을 세우며 건강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신장 기능이 6%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듣게 된 것이다. 신장을 이식받지 않으면 생명도 위태롭다는 말에 이제 천국의 영생을 살 수 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아직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사역을 다 못 마쳤다는 생각에 못내 아쉬움이 들었다.감사하게도 아들의 신장 기증에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고 지금은 26년 전 북한선교를 시작할 때 보다 더 건강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나에게 남은 사
98년부터 이어진 중국 현지의 탈북민 사역을 마무리하고 2011년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다. 하나님께서 한국에서 새로운 북한선교를 시작하라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었다.순종하는 자세로 한국에서 탈북민교회를 개척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했다. 하루 세 시간씩 기도하고 있을 때 새로운 사역이 열리기 시작했다. 탈북 청소년들이 교회로 하나둘씩 모이더니 수십 명으로 불어나기 시작해 교회를 이전해야 할 정도였다. 몰려드는 청소년들과 함께 중국에서처럼 통독과 암송, 기도 위주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성경통독학교를 열었다. 처음 학교를 시
북한선교를 오랜 기간 해 오면서 여러 편견에 부딪히곤 한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26년간의 사역은 그 편견을 놀라운 방법으로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연속이었다.중국에서 추방당해 한국으로 돌아온 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추방 전 중국 미션홈에서 함께 생활했던 형제들이었다. 북송됐지만 당시 남북정상회담의 화해무드 속에서 단순 탈북자는 석방시켜 줬고, 그러자 다시 탈북해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국가에서 받은 정착금을 기꺼이 헌금했고 그것으로 열방빛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탈북민들은 받는 것에만
1998년 8월부터 2001년 6월까지 만 3년 동안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던 탈북민 성경통독반 사역은 6월 11일, 나를 비롯해 76명이 선생들이 공안의 급습에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350여 명의 탈북민들이 미션홈을 찾았고 그 중 250여 명이 예수를 영접했다. 70여 명이 북한 선교사로 헌신해 중국 전역에서 탈북민 제자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한 조선족 학생의 밀고로 서안에 주로 위치해 있던 우리 미션홈 13개 중 8개가 적발됐다. 16년 간 중국입국 금지 명령과 함께 한국으로 추방된 후 우선 나에게 남아있던 재정 모두를 남김없
예수님께선 비유를 통해 의인 99명보다 회개한 죄인 한 명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북한 사람 한 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른다. 탈북민 형제들이 하나님의 일꾼들로 세워지기까지 고되고 오랜 정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1~3년간 합숙을 통한 공동체 삶 속에서 신약 100독 이상, 구약은 20독 이상, 성경 암송을 500절 이상 한다. 매일 2시간 이상 부르짖는 기도와 성막과 구속사와 성경지리와 교회사와 설교 강의를 통해 일꾼으로 세워진다. 한 조선족 형제의 고발로 점조직처럼 운영되던 미션홈의 선
1998년 8월 8일은 내겐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처음 만난 날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 없이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탕자처럼 돌아온 나를 예수님은 구원해 주셨고 영생을 주셨다. 그 구원의 감격을 이기지 못해 신학을 시작했지만 말씀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하루 종일 성경만 읽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신대원 선배의 강권으로 가게 된 중국 연길의 한 허름한 아파트. 하나님께선 그곳에서 내 목회 인생을 송두리째 걸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다.그 아파트 안에는 여섯 명의 탈북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