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학교를 가려는데 비가 온다. 우산을 찾아보지만 비닐로 만든, 그것도 여기저기 찢어진 것뿐이다. 그것이라도 쓰고 가야 하던 때가 있었다. 그나마 없어 가방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뛰어가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었다. 요즘처럼 우산이 흔하지 않았던 때, 갑작스러운 비로 쩔쩔 매는데 누군가의 우산이 쏟아지는 비를 막아주기도 했다. 모든 것이 결핍한 세상이었지만 참 따뜻한 시절이었다.

우산! 참 좋은 것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막아주어 옷이 젖지 않게 하는 고마운 우산. 해가 쨍쨍. 그래서 뜨거울 땐 햇빛을 가려준다고 양산이라고 부르지만 우산이면 어떻고 양산이면 어떠랴? 비든 햇빛이든 나를 힘들게 하는 뭔가로부터 나를 보호한다는 면에서는 같다.

국가 전략적으로는, 무시무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핵우산’이란 것도 있다. 우리나라는 핵무기가 없어도 미국의 핵이 우리의 우산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것이 북한 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단 것이다. 물론 보호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를 통제하기도 하지만.

과학과 의학, 기술과 정보, 돈이나 권력, 능력이 있는 부모나 친구 등이 내 인생의 우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완벽한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단 걸 우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깨닫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무엇이라도 어딘가 구멍이 있다면 모든 것을 언제까지나 막아주진 못한다.

비싸고 멋지고 기능적으로도 뛰어난 우산도 많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우산이라도 바람이 심하게 불면 뒤집히고 찢어지기도 한다. 또 지하철에 두고 내리기도 한다. 세상의 우산이란 다 그런 것.

진정한 우산! 오직 하나다. 주님, 그 분이 우산이다. 그 우산 아래 피할 때 비로소 우리의 생명이나 행복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도 보존되는 것. 그 외의 다른 것을 우산처럼 믿지 않아야 한다. 교회, 그 진정한 우산을 제공하는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데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코로나블루에 제대로 대응은 하는지. 교회가 우산이 아니라 오히려 비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그리스도인, 비 맞고 뛰어가는 낯선 이웃에게 다가가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함께 우산을 쓰고, 내 어깨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나에게 우산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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