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세계적 명품의 대명사 프라다는 ‘미우치아 프라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것을 1971년 손녀 프라다가 이어받는다. 그녀는 당시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의 프라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남편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를 만나면서다.

베르텔리와 만남은 베르텔리가 프라다의 소위 짝퉁, 즉 모조품을 만들어 팔다가 프라다에게 걸리면서 시작되었다. 프라다는 화가 났지만 베르텔리는 사업 확장을 이야기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업 파트너가 되었다. 평생을 함께 가는 부부가 되어 오늘날의 프라다를 만들었던 것이다. 짝퉁을 만든다는 것은 그 대상의 가치를 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가치를 모른다면 짝퉁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가치가 있기에 모조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베르텔리가 모조품을 만든 것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그만큼 프라다의 가치를 알았다는 것이다. 프라다는 그것을 알아챘고 따라서 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평생을 함께 갈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모방한다는 것, 베끼고 싶다는 것은 그 가치를 안다는 것일 수 있다. 그 대상의 가치를 알아야 흉내라도 내고 싶은 것이다.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 삶의 발자취를 따른 중세의 수도자인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아 가고 싶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79-1471)가 남긴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는 기독교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 분을 그대로 베끼고 싶은 욕망이 솟고, 그 분의 모조품으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은 그 분의 가치를 알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난 항상 그 분의 짝퉁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또 내가 섬기는 교회는 얼마나 그 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그 분 자체일 수 없기에 그 분을 흉내라도 내야 하는 난 때때로 주님의 짝퉁이기보다 오히려 어설픈 세상의 저질 짝퉁 같아 부끄럽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와 그 품격을 드러내고 있는지 생각하니, 그 분을 베낀다는 것은 너무 먼 길인 것 같아 슬프기도 하고. 나는 그리고 우리 교회는 과연 그 분의 가치를 알기는 하는지. 그리고 안다면 아는 만큼 닮아가고 있는 것인지 늘 맘만 아플 뿐이니 이를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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