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인 목사(청량교회)

험난한 십자가로 가는 길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송준인 목사(청량교회)
송준인 목사(청량교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는 검프의 친구인 다섯 살짜리 제니가 주정뱅이 아버지를 피해 몸을 숨기려고 옥수수 밭을 가로질러 뛰어 가며 기도하는 가슴 아픈 장면이 나옵니다. “사랑의 하나님, 여기서 멀리 멀리 날아가 버릴 수 있도록 저를 새로 만들어 주세요.” 제니의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성적으로 학대해 왔습니다. 비록 다음날 아버지가 체포되고 제니는 다른 사람과 살게 되지만 아버지가 자신에게 행한 일 때문에 받은 상처를 극복하려는 그녀의 투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녀는 검프를 만나러 그 작은 마을로 돌아옵니다. 이제 30대 성인이 된 두 사람은 그녀가 옛날에 살았던 버려진 오두막 주변을 걷습니다. 그녀는 그 집을 바라보자 묻혀 있던 학대의 기억들이 마음속에서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울음을 터뜨리고 주위에 있는 돌멩이를 집어 들어 그 오두막을 향하여 있는 힘껏 집어 던짐으로써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더이상 던질 돌멩이가 없자 구두까지 벗어 던집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낍니다. 나중에 검프는 그 광경을 회상하며 말합니다. “때로는 돌멩이가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는 것 같아.”

여러분도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와 고통을 생각할 때 검프가 한 말에 공감하실 줄 압니다. 제니가 품었던 것과 같은 뿌리 깊은 고통과 분노가 마음속에서 곪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때때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흔들어댈지도 모릅니다. 그때 여러분 안의 분노가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하나님,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무슨 일을 했습니까?”

십자가의 능력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율법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셨고 우리를 위해 그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은 것입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이 죽은 자에게 대해서는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과 동시에,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고,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신자들이 죄와 율법과 세상의 통치와 지배를 받던 과거의 삶에서 이제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로 나아가라

18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선구자인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대가 탄식하고 있다고 해서 그대를 지으신 분이 곁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해서 그대를 지으신 분이 가까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기쁨을 주셔서 우리의 슬픔을 소멸시키시며 우리의 슬픔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우리 곁에 앉아서 신음하신다.”

그렇습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로 아파하는 영혼이 있다면, 이 시간 갈보리 언덕으로 갑시다.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보기 바랍니다. 거기 십자가 위에 매달려 일그러지고 고통당하신 분을 함께 바라봅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그분의 빛으로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상함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못 자국 난 주님의 두 손에는 실제로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매인 사람들의 사슬을 풀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상처에 빛을 비춰줍니다. 다른 시각으로 상처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실제로 십자가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비난 받고 정죄 받은 자들이 자비와 은혜를 얻는 곳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치유의 보혈이 갈보리 언덕에서 흘러나옵니다. 그곳은 용서와 치유, 구원과 자유, 자비와 은혜의 장소입니다. 우리의 나음을 위하여 그분이 상처를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그 상처를 치유하기를 회피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방어기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고통으로 촉발된 건강하지 못한 반응들과 파괴적인 습관들이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십자가로 가려면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처를 십자가 아래로 가져가려면 십자가까지 이어진 길로 들어서야 하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길은 부정이 아니라 수용의 길입니다. 숨기는 것이 아니라 대면하는 길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그 길은 사람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길입니다. 평탄하고 안전한 고속도로가 아니라 험난하고 위태로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십자가 아래 도착할 때까지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 여정을 시작할 때는 열정을 쏟아 붓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낙심하여 되돌아가고 싶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 길은 너무나 험준하고 목적지는 너무나 멀어 보입니다. 그러나 비틀거릴 때가 많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계속 가게 되면 그 길이 복된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도달했을 때만이 아니라 그 길을 가는 내내 자비와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서 걸으시며 길을 인도하십니다. 어두운 미지의 장소 어느 곳으로든 발을 들여놓아 보십시오. 못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그분의 발자국이 이미 그곳에 찍혀 있을 것입니다. 더 기쁜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 옆에서 걸으시며 우리의 사기를 북돋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 뒤에서도 걸으시면서 우리의 다리가 후들거릴 때 붙잡아 주십니다. 십자가로 가는 길은 이처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늘 함께 하기에 우리는 용기를 얻어 그 여정을 계속하게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마라조프가의 형제들>

이 소설에는 한 가난한 농노의 아이가 놀다가 실수로 주인의 사냥개를 돌로 맞힌 장면이 나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격분합니다. 그래서 그 소년을 붙잡아 오게 한 다음 사나운 개들을 풀어 놓아서 소년을 갈가리 찢어 죽이는 광경을 그 소년의 어머니에게 억지로 지켜보게 만듭니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인 이반은 그 주인이 한 일을 듣고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머리를 흔듭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어떻게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실 수 있는가를 오랫동안 생각한 후에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이 만드신 세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 역시 그러한 부당하고 잔인한 고난에 맞닥뜨릴 때 이반처럼 당혹감을 나타낼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어지럽고 복잡한 생각들, 우리의 믿음에 시험거리를 던지는 생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난해한 문제를 어떻게 밝히고 있습니까? 우리가 부당한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믿기 위해 애를 쓸 때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십자가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가 겪는 고난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은 무관심한 채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범위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불의를 겪으시고, 벌거벗기는 수치를 당하시고, 조롱을 참으시고, 다른 사람들의 분노의 표적이 되시고, 버림 받으셨습니다. 생명의 물이 목마르셨습니다. 생명의 떡이 굶주리셨습니다. 율법을 정하신 분이 부당하게 불법자로 낙인 찍히셨습니다. 거룩하신 분이 죄인이 되셨습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가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세상을 만들고 죽은 자들을 일으킨 두 손이 생명을 잃어 뻣뻣해질 때까지 못 박혀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고민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슬픔의 사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고 있을 때, 스펀지를 쥐어짜듯 뭔가가 우리의 마음을 쥐어 짤 때, 우리가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만족할 만한 유일한 해답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더 큰 고난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그분은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열어 보여줄 열쇠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슬픔의 사람으로 충분합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돌멩이를 던진 제니처럼 우리는 가당치 않은 격렬한 고통에 맞부딪칠 때 무엇인가를 집어던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로 가는 길에는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고난 받는 자들이 분노에 가득 차서 던졌던 돌멩이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초청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자, 이 험준한 길을 나와 함께 걷자, 돌멩이를 던지고 싶다면 던져라 그러나 되돌아가지는 말아라. 십자가를 향해 계속 걸어가라. 너의 고난을 나의 더 큰 고난에 비추어 묵상해 보라. 너의 상처를 나의 상처에 비추어 보아라.”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코로나19로 인하여 많이 힘드시죠? 종려주일 아침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험난한 고난의 길이었으나 그 길이 있었기에 사흘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힘들고 괴로워도 대속의 은혜와 부활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앞서 가신 주님을 바라보시고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