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제네바 목사들, 이렇게 설교했다

 

▲ 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종교개혁은 성사중심에서 성경중심으로 옮겨온 사건이다. 그래서 미신적인 미사와 라틴어라는 단일 언어를 통한 통제는 이제 모국어 성경의 번역을 통해 설교가 예배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설교는 ‘들리는 말씀’으로, 성찬은 ‘보이는 말씀’으로 참된 교회의 표지가 되었다.

<기독교강요>에서 교회의 표지를 통해 참 교회를 설명하던 칼뱅은 제네바에서 말씀과 성찬, 그리고 권징이 바로 선 교회를 세워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승패는 언제나 말씀에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제네바교회에서 설교는 어떻게 행하여졌을까?

제네바 목사들은 이렇게 설교했다. 먼저, 제네바에는 세 개의 교회가 있었다. 제네바의 중심부에 생 피에르(st. Pierre)와 라 마들렌(la. Magdeleine), 그리고 강 건너편에 생 제르베(st. Gervais)교회였다. 제네바에는 5명의 목사와 3명의 조사가 2인 1조를 이루어 설교했고, 세 개의 교구를 매주 번갈아 돌아다니며 설교했다. 가장 중심의 교회는 생 피에르였다. 생 피에르 교구는 옛 질서 때의 구역, 즉 생 제르망, 상트 크로아, 노트르담 누베, 생 레지르로를 포함하였다.
먼저 주일예배를 살펴보면 새벽에는 생 피에르와 생 제르베, 즉 강 이편과 저편에서 참석할 수 있도록 하였고 관례적인 예배시간에는 생 피에르, 생 제르베, 라 마를렌에서 각각 주일예배를 드렸다. 어린이를 위한 정오의 교리문답과 주일 3시의 예배도 세 교회에서 각각 행하여졌다. 이렇게 주일에는 새벽, 낮, 오후의 예배가 있었던 것이다. 평일에는 같은 시간에 세 교구에서 매일 설교가 있었고 여름에는 6시에, 겨울에는 7시에 있었다. 아침기도회의 성격이었다. 이 외에도 생 제르베에서는 수요일에 오전과 오후에 예배를 드렸고, 특별히 생 피에르에서는 일주일에 월·수·금요일에 3번의 설교가 있었다.

1541년의 법령에는 매일 아침예배가 없지만 1549년 10월 시의회는 평일 설교의 빈도를 매주 3회에서 매일로 증가시켰다. 이렇게 하여 생 피에르에서는 주중에 12번의 예배가, 생 제르베에서는 10번, 라 마들렌에서는 9번의 예배가 드려졌다. 칼뱅은 주일의 오전과 오후에 그리고 주중에 월·수·금요일에 설교했다. 칼뱅의 설교는 그의 건강상태에 따라 시의회가 그 횟수를 정하였는데 1542년 9월에는 건강을 염려하여 주일에는 한 번만 설교하도록 하였다. 또한 칼뱅이 시민법을 제정할 때는 일주일에 한 번만 설교하도록 배려하였다.

칼뱅은 적어도 매주 5번의 설교를 하였고,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동안 4000번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특히 칼뱅은 주일 오전예배에는 신약성경을, 주일 오후예배에는 시편을 설교했다. 평일에는 구약을 강해하였다. 칼뱅은 연속강해(lectio continua)방식을 선택하였지만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에는 강해를 중단하고 소위 절기설교를 하였다. 이외에도 1544년 시의회는 고난주간에도 연속강해를 멈추고 수난기사에 맞추어서 설교하도록 하였고, 12월 25일이 주일이 아닐 때는 다음 주일 설교 본문을 누가복음 2장으로 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칼뱅의 제자였던 데오도르 드 베즈(Theodoro Beza)는 칼뱅의 설교 사역을 회고하기를 “주간에 매일 설교하는 것 외에도 칼뱅은 할 수 있을 때마다 주일에 두 번씩 설교했다. 죽을 때까지 중단하지 않고 이 패턴을 유지했고, 심하게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했다.

칼뱅은 주로 한 시간 이상 설교했고, 원고나 메모 없이 설교했다. 생애의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거동이 힘들 때에도 의자에 앉은 채 교회로 데려가 줄 것을 부탁하여 강단 사역의 책임을 완수하려고 노력했다. 4000편이 넘는 그의 설교는 안타깝게도 19세기 초 제네바대학교가 도서관 수리를 하면서 고물상에게 넘겨주었고, 36권의 설교집 중에 14권만이 복원되었다. 칼뱅은 그야말로 제네바의 목사이자 설교자로서 충실한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칼뱅을 비롯한 제네바 목사들의 설교사역은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베른지역에 있는 제네바 영지에 속한 교회에서 제네바 목사들은 예정론을 설교하다가 베른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감금되었다. 또한 제네바 목사회 안에서 조차 볼섹의 동조자들이 있었고, 베른과 취리히, 바젤에서는 영원예정의 교리를 비아냥거렸다. 또한 아미 페렝의 부인 프랑수아는 노골적으로 칼뱅과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고, 아벨 푸팽 목사와는 논쟁을 일삼았다. 또한 피에르 아모 역시 칼뱅을 비난했다. 필리베르 베르틀리에는 아예 칼뱅의 설교 때 노골적인 기침으로 설교를 방해했다. 또한 칼뱅은 1537년 시의회를 ‘마귀의 의회’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시의회에 소환되었고 기록상으로 칼뱅은 4번이나 시의회에서 해명했고 두 번이나 사임을 신청했다.

칼뱅은 설교를 자신의 직무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고, 죽기 전 제네바 시의회 피에르 체넬라에게 구술한 유언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분량에 맞추어 설교와 저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가르치고, 성경을 신실하게 설명하는 데 힘썼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