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준비된 말씀의 종을 보내시다

▲ 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1536년은 칼뱅과 제네바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이다. 먼저 칼뱅이 바젤에서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했고, 제네바는 복음을 따라 살기로 모든 시민이 결정한 해이기 때문이다.
제네바는 스위스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도시 중 하나이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1524)가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베른(1528) 바젤(1529) 뇌샤텔(1530) 제네바(1536)로 이어진다.

중세시대에 야만족을 대상으로 선교할 때 한 도시, 한 민족이 돌아오는 집단적 회심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시대의 회심 역시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집단적, 제도적 회심이었다. 이것이 제국에서는 신앙속지주의(Cuius region)에 의해서 영주가 선택한 종교가 곧 자신의 종교가 되었고, 스위스 개혁파 도시에서는 시의회가 선택한 종교가 곧 시민의 종교가 되었다. 그렇다면 왜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였는가?

스위스의 상황을 보면 7개 주는 가톨릭을 고수했고, 4개 주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그리고 5개 주는 중립적이었다. 스위스는 취리히에서 개혁이 시작되어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 장크트 갈렌으로 퍼져나갔다. 제네바는 1536년에 개혁을 받아들이는데 베른의 영향을 받아 베른식 신학을 강요받지만 칼뱅의 사역은 뇌사텔, 보와 같은 다른 프랑스어권 스위스 개혁파 도시들에 영향을 미치고 마침내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의 로마(the Protestant Rome)’가 된다.

제네바는 50개의 자유도시 중 하나면서 외형적으로는 주교 군주의 지배와 사부아 공작의 실효적 통제 아래 있었다. 자국 군대를 소유하지 못했던 제네바는 칸톤과 같은 스위스 도시국가들을 동경하면서 프랑스의 진격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사부아 공국에게 자유를 빼앗기는 것을 염려했다. 지금까지 제네바는 베른과 프리부르와 함께 3국 동맹을 맺고서 군사적 교류를 함께 해왔다. 하지만 이 동맹은 베른이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서면서 구교를 고수했던 프리부르와의 3국 동맹은 깨어지게 된다.

이제 제네바는 프리부르와 함께 구교에 남을 것인가 베른을 따라 개혁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제네바는 결국 베른과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베른 군대에 치러야 할 채무에 대한 지불 합의를 하게 된다. 1536년 크리스마스까지 1만에퀴를 지불하기로 합의했지만 제네바는 돈이 없었다. 지금까지 제네바는 소위 국방비, 즉 용병 비용을 지불하는데 신물이 났다. 매번 메디치은행 제네바지점을 통해 차입해서 지불했고, 또 제네바 주교는 엄청난 면죄부를 발행했다.

정치적 독립과 군사적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장차 당당하게 칸톤의 지위를 부여 받기 위해서 제네바 시의회는 6%의 이자로 시민들과 영주권자들에게 국채발행을 하고, 담보나 국가에 건국 헌납을 한 자에게는 공공속성, 즉 관직을 제공할 것을 발표한다. 또한 돈을 받고 영주권을 부여하는데 불과 6개월 사이에 300명의 영주권자가 늘어났다. 이때 장 발라르는 50에퀴를 헌납하고 시의회 의장을 받게 된다. 시정부는 1만80에퀴를 두 개의 큰 소포에 담아 베른으로 전달하고, 나머지 금액으로 프랑스로부터 화약을 사들인다. 제네바의 긴박한 건국의 순간이었다.

한편 베른은 매우 공격적으로 프랑스어권 도시 중의 보를 공작령으로 얻어내고, 로잔관구를 흡수하면서 제네바까지 지배하려 했다. 이런 야망은 1536년 1월 마침내 베른의 6000명의 군대가 제네바를 향해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두 달 동안 전투가 지속되었고 3월 주교 군주는 대성당과 도시를 버리고 도망했고, 제네바는 전격적으로 정치적 독립과 함께 개혁을 받아들였다.

1536년 5월 21일 전체의회, 즉 투표권을 가진 부르주아지가 만장일치로 손을 들어 복음에 따라 살기로 맹세했다. 드디어 주교와 생 클레르의 수녀들이 떠나고 주교의 저택은 감옥으로, 매각된 교회의 재산은 구빈원에 기부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집단적 회심은 다분히 정치적 요인과 관련되어 있었고, 제네바 각 시민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이 작은 도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이후 제네바는 베른의 눈치를 보며 사사건건 모든 것을 간섭받게 되는데, 그 첫째가 바로 베른식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제네바가 신생개혁도시로 태어난 역사적인 순간에 칼뱅은 제네바에 불시착하게 된다. 하나님이 준비된 말씀의 종을 보내신 것이다. 제네바가 5월에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였다면 칼뱅은 아마도 8월경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9월 파렐의 추천으로 시의회는 ‘그 프랑스사람’을 제네바의 성경교사로 임명한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성경교사로 출발했다.

맥닐(John T. McNeill)은 “칼뱅은 4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가 여전히 그의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유익한 지상교회의 위대한 교사가 되었다”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맥그래스의 표현과 같이 “칼뱅이 제네바를 만들었고, 제네바가 칼뱅을 만들었다!”

지금도 답은 하나다. “주여! 이 시대에도 말씀의 종들을 당신의 교회에 보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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