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가정은 개혁신앙 증명해야 한다

▲ 임종구 목사
(푸른초장교회)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머무는 동안 가정을 꾸리게 된다. 종교개혁은 종교, 직업, 교육, 가정에서 근대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정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역할을 했다.

칼뱅은 1540년 8월 10일 파렐의 주례로 이들레트 드 부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한다. 그녀는 재세례파 장 스토르데르의 미망인으로, 남편이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부처의 소개로 칼뱅과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칼뱅이 결혼하기까지 몇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칼뱅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차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에 대해 ‘나를 사로잡는 유일한 아름다움이란 정숙하고 친절하여 검소하며, 인내성이 있는 여인, 그리고 나의 건강에 유의해 줄 수 있는 그런 여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여성관을 밝히고 있다.

1540년 2월 6일자 편지에서 칼뱅은 자신이 귀족 가문 출신의 한 젊은 여인을 소개받았는데 지참금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또 자신의 출신 신분과 교육에 집착할까 두려워 포기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의 오빠와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칼뱅은 단념해주기를 바라면서 프랑스어의 습득을 요구하는 한편, 동생을 통해 직접 다른 여인에게 청혼하기도 했다. 칼뱅이 청혼한 여인은 가난하고 덕스러운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칼뱅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리고 부처의 소개로 칼뱅은 마침내 결혼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칼뱅은 이들레트 드 부르와 하숙을 쳤고, 시민권을 얻기 위해 재단사조합에 가입하기도 했다. 칼뱅은 오늘날 여성들이 원하는 수준의 여성이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가장의 의무, 아내와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칼뱅이 목회를 통해 평생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41년 칼뱅이 레겐스부르크회담에 참석해 있는 동안 스트라스부르에는 흑사병이 휩쓸었다. 칼뱅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명의 하숙생 클레드 페레와 리슈브르가 희생되었고, 아내는 가까운 친척집으로 피신했다. 칼뱅은 급히 스트라스부르로 돌아가려고 했고 이 무렵의 편지에는 가족을 염려하는 칼뱅의 마음을 찾아볼 수 있다. 1541년 제네바의 초청으로 칼뱅의 가족은 다시 제네바에 정착을 하지만 칼뱅의 개인사는 어둡고 침울했다.

자크라고 이름 지어진 칼뱅의 아들은 살아남지 못했고, 출산과정에서 건강이 악화된 이들레트는 결국 1549년에 사망한다. 칼뱅은 유년시절 어머니와 두 동생의 죽음을, 청년기에는 아버지와 형 샤를의 죽음을, 그리고 제네바에서는 아들과 아내의 죽음과 마주서야 했다. 이 누적된 죽음의 학습은 칼뱅에게 많은 상처와 절망을 안겨 주었지만 개혁자는 마침내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 내세를 소망하는 경건으로 나아간다.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칼뱅의 가정에는 계속하여 불행한 일들이 일어났다. 칼뱅의 동생 앙투앙은 제네바에서 시민권을 부여받고 서점을 운영하면서 시의원까지 지내지만 세 번의 결혼과 간통혐의로 이혼을 거듭하고 앙투앙의 부인 안느 역시 간통혐의로 칼뱅은 시의회에 출두해야 했다. 안느는 결국 칼뱅의 곱사등이 하인과의 간통으로 국외 추방되었다.

1562년에는 칼뱅의 의붓딸 유딧의 간통혐의로 칼뱅의 설교가 중단되었고, 의붓아들의 가출로 칼뱅은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러나 칼뱅은 남겨진 조카와 자녀들을 위해 얼마 되지 않는 유산을 구빈원과 조카들에게 남겼다. 칼뱅 역시 범인과 동일하게 늘 가정사의 고초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칼뱅은 결혼을 언약으로 이해했고, “하나님이 결혼의 창시자”라고 말하면서 1541년의 표준법령, 1542년의 결혼예법, 1546년의 결혼규칙을 입안했다. 또 치리회인 콩지스투와를 통해 결혼과 이혼, 재혼, 부부의 별거, 약혼의 파기, 배우자의 의무 등에 대해 직접 상담하고 목회적 차원에서 지도하였다. 또한 칼뱅은 불법적인 성적 결합을 창조질서에 대한 거부로 보고 평생 이성간의 일부일처의 연합, 즉 사랑으로 연합하는 육체의 능력과 본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당사자, 곧 남자와 여자의 영속적인 결합을 성경적인 결혼과 가정으로 보았다.

그는 남색, 수간, 동성애, 다양한 변태적인 행위와 노인과 젊은 여성의 결혼을 정죄하고 특히 간음죄에 대해서 가장 큰 비난을 퍼부었다. 칼뱅은 간음죄를 결혼 언약의 창조질서를 위반하는 것으로 간음한 자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을 옹호했다. 또한 남편과 아내의 별거를 간음과 동등한 죄로 간주하고, “죽을 때까지 함께 살고, 함께 거주해야만 한다”고 말하며서 침실을 분리시키는 각방조차 반대했다. 또한 별거하거나 이혼하려는 부부에게 서로 화해하고 가정과 결혼관계를 회복하며 집을 나간 배우자를 용서하라고 권고했다.

특히 1546년 결혼규칙에는 부부가 다시 결혼관계를 회복하는 절차까지 포함시켰다. 칼뱅은 결혼의 규범을 소개할 때 실제로 자신이 아내에게 구혼했던 사례를 설명하기도 했고, 동료 개혁파 신자들이 불신자와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교회의 건설자 칼뱅은 가정의 중요성을 더 높였다. 개혁 신앙은 가정을 통해서도 증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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