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 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칼뱅 당시 제네바에는 유럽 전역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수많은 망명자들이 유입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이단자들과 정통교리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제네바교회는 이런 이단자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이제 제롬 볼섹과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사건을 두 번에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동안 신학문제로 카롤리(1537), 볼섹(1551), 트롤리에(1552), 세르베투스(1553)와 4번의 논쟁을 벌였다.

1549년부터 제네바에는 엄청난 망명자들이 밀려들어왔다. 1551년 5월 15일에는 2명의 이단자가 들어왔는데, 금 세공업자인 미셀 폴루스와 기욤 그니에였다. 제세례파였던 이들은 5월 19일에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특히 1551년 8월 8일의 주간성경연구모임인 콩그레가시옹에서 영원 예정의 교리에 대해 잘못된 의견을 갖고 있던 의사 제롬 볼섹을 소환하여 견책했다. 하지만 볼섹은 에스겔 18장 25절을 인용하면서 완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같은 해 10월 16일의 성경모임에서 또 다시 충돌했다. 이날은 생 앙드레가 발제하고 파렐이 논평했는데 공개질의 시간에 볼섹이 이견을 제시하였다. 생 앙드레가 요한복음 8장 47절을 설명한 후 볼섹은 이의를 제기하면서 영원 예정과 정죄에 대해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뱅이 볼섹의 교리적 이탈을 지적하고 교화하였다. 이날 모임에 참석했던 제네바 행정시장인 장 드라 메조뇌브가 볼섹의 이단성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모든 참석자의 서명을 받아 기소하였다. 제네바목사회는 이미 세 번에 걸쳐 제롬 볼섹의 문제에 대해 지적했다. 1551년의 3월과 5월, 8월에도 지적했고, 10월 16일에는 기소했다.

한편 볼섹은 이날의 기소로 긴급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베른의 위정자들에게 자신을 구명해줄 것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보낸다. 뿐만 아니라 볼섹의 후견자인 자크 브로고뉴도 두 번의 탄원서를 보냈다. 그는 탄원서에서 제롬은 자신의 주치의이며 지금까지 자신의 병을 효과적으로 치료해왔는데 이제 겨울이 닥쳐옴에 따라 자신을 치료할 볼섹을 석방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제네바목사회 회의록은 이런 청원서와 탄원서의 전문을 실은 후, 목사회의 17개 항의 질의서와 볼섹의 답변서 전문을 기록하고 있다. 도시의 위정자는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억류에서 풀어줄 것을 청구했지만, 보증을 설 사람이 없어 볼섹은 계속 구류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또한 위정자는 이 논제를 라틴어로 번역해서 바젤과 취리히, 베른에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목사회가 보낸 공개질의서를 보면 “여기에 제롬이라는 어떤 사람이 있으며 수사의 옷을 버린 후 거짓과 속임수를 통해 떠돌아다니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공공의 모임에서 하나님의 예정의 교리를 뒤집어엎으려고 한 지 8개월이 되었고….” 제네바목사회가 스위스 각 도시로 보낸 볼섹에 대한 공개질의서는 바젤과 취리히, 뇌샤텔에서 답변이 왔다. 바젤에서는 시몬 슐처와 미코니우스의 서신도 함께 왔다. 이 도시들의 답변서를 보면 독일어권 도시였던 취리히와 바젤은 미온적인 반면, 파렐이 목회하던 프랑스어권인 뇌사텔은 제네바교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1551년 12월 11일에 성찬이 다가옴에 따라 성례전을 타락시키지 않기 위해 이 문제를 다루었고, 12월 23일 목요일 치리회에서 나팔소리와 함께 제롬은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제롬 볼섹 사건은 당시 제네바교회가 이단과 정통교리를 거부하는 사람에 대해 어떤 절차와 방식으로 처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제네바목사회와 제네바 수구세력 사이의 힘의 충돌이 교리논쟁을 통해 표면화된 사건으로 칼뱅의 개혁이 심각한 도전을 받았던 사례였다. 제네바가 스위스에서 가장 늦게 개혁을 선언을 도시였지만 종교개혁의 산실과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목회자의 평생교육과 신학검증체계가 효율적으로 가동되었기 때문이다.

제롬 볼섹 사건은 콩그레가시옹, 즉 목회자의 평생교육시스템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제네바교회는 치리회와 목사회의 두 축이 도시의 개혁을 이끌었다. 치리회가 재판정이었다면, 목사회는 광장이었다. 치리회가 상담을 하고 징계를 하는 사이에, 목사회는 토론을 하고 서적을 발간했다. 치리회는 소명하기 위해 나아갔지만, 목사회는 토론하기 위해 나아갔다. 그 가운데서도 공개적이고 상설화된 콩그레가시옹은 성경연구와 해석의 공적 검증 창구였다.

이 회합에는 일반인의 참석과 질의응답도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도시의 이단자와 불건전한 성경해석과 이해를 걸러내고 바로잡았으며, 굴복하지 않는 이단자를 처리하는 제1심 기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 동시에 제기된 문제에 대해 폐쇄적이지 않고 연대적이어서 스위스 각 도시의 의견을 듣고자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이런 제네바의 목회자 평생교육과 신학검증시스템이 결국 개혁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