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 (푸른초장교회)

통렬한 반성은 어디에 있는가

▲ 임종구 목사
(푸른초장교회)

개혁자 칼뱅이 제네바 1차 체류에서 베른식의 기독교를 전복시키기에는 기반이 약했다. 제네바인들은 구교의 관습을 떨치지 못했고 성경적 교회 건설의 열망도 없었다. 기초법령은 시의회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고, 신앙고백서는 저항에 부딪혔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아 피에르 카롤리에게 아리우스자라고 고발을 당하기까지 했다. 이제 칼뱅의 남은 선택은 자신이 현실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이 도시 거부할 것인가였다.

그러나 이 신임 개혁자는 보름스의 개혁자처럼 대담하게도 부활절 성찬의 집례를 거부해버렸다. 시의회도 실력으로 나왔다. 결국 제네바 강단의 3총사는 추방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은 제네바 국경근처에서 초조하게 3일을 기다렸으나 수정법령마저 거부당하고 결국에는 국경을 넘는데 강을 건너다가 조난의 위험도 당하였다. 시각장애인 목사였던 코르는 오르브로 떠났지만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파렐과 칼뱅은 바젤로 갔다가 파렐은 뇌샤텔에 자리를 잡고, 칼뱅은 부처(Martin Bucer)의 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1538년 9월부터 프랑스 피난민들의 교회인 생 니콜라이교회(Saint Nicolai)에서 설교를 시작했고 이어 막달레나 교회에서도 설교하게 된다. 또 고등 교육기관이었던 김나지움에서 강의했고,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 회담에 참석했다.

그는 <기독교강요> 2판(1539)과 불어판 초판(1541)을 출판했고, 로마서 주석도 펴냈다. 개인사적으로는 결혼을 했고, 힘든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아내와 하숙을 쳤으며, 시민권을 얻기 위해 재단사 조합에 가입하기도 했다. 칼뱅은 이 무렵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가난한 시절이기도 했다.

칼뱅이 추방을 당하고서 가장 힘든 때를 보내던 때에 제네바 역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1539년 3월 26일 카펜트라스의 주교였던 추기경 사돌레토(Jacopo Sadoleto)는 구교로 돌아올 것을 회유하는 서신을 제네바로 보낸다. 그러나 추기경에 답신을 보낼만한 사람을 찾던 중 결국 베른당국의 부탁으로 칼뱅이 논박서신을 보내게 된다.

그 해 10월 5일에 보낸 칼뱅의 답변을 보면 그는 물리적 공간으로는 스트라스부르에 있지만, 그 영혼과 심장은 제네바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는 사돌레토에게 “비록 나는 당분간 제네바의 교회를 책임지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를 부모와 같은 애정으로 감싸고 싶은 나의 마음을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그 교회를 맡기셨을 때 나를 영원히 그 교회에 충성하도록 맹세 시켰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단 6일 만에 작성된 답변서신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았다. 칼뱅에게 제네바는 추방되고 재적되어 버린 교회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속한 교회이며, 칼뱅 스스로가 마치 이 문제의 중심에 있고 자신이 모든 개혁교회의 대표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에게 제네바는 여전히 자신의 목양지이자 교구였던 것이다.

나중에 루터조차 이 편지를 읽고서 상대방을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훌륭한 답변이라고 칭찬했다. 종교개혁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변증서신으로 알려진 이 답변서신에서 칼뱅은 가톨릭과 주교들의 무책임함과 교회의 재정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칼뱅은 제네바교회는 교회법에 따라 재정을 관리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목사들은 시의회에서 박봉의 봉급을 받으면서 검소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칼뱅과 사돌레토 추기경 사이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칼뱅의 정적인 로마교회의 사돌레토 추기경이 제네바를 지나며 칼뱅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사돌레토는 너무나 초라한 칼뱅의 집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칼뱅의 사환이 대문에 와서 사돌레토를 맞이했을 때 사돌레토는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환을 보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칼뱅 선생을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이때 사환이 사돌레토에게 자신이 칼뱅이라고 말했다 한다. 추기경의 눈에 사환처럼 보였던 사람이 바로 칼뱅이었던 것이다. 후에 칼뱅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교황 파이어스 4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이교도에게 가장 무서운 무기가 있는데 그것은 돈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런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다면 나의 제국은 대양에서 대양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와 신학적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오늘 교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통렬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세미나와 종교개혁지 탐방, 기념 출간들, 수백 편의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개혁신학의 유산을 받은 종교개혁의 후계자들의 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다. 오늘 한국교회에 신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찰과 반성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칼뱅의 신학을 좋아하면서 칼뱅의 청렴하고 정직한 목사의 모습은 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