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제네바교회, 이렇게 구제했다

▲ 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Service)’라는 부르는 것은 구제가 예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종종 구제를 ‘예배 후의 예배’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예배(worship)’와 ‘복지(welfare)’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렇다면 칼뱅이 사역했던 제네바교회의 구제사역은 어떠했을까?

베르게리오는 제네바의 모습을 “나는 교회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모금을 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단 한 명의 거지도 만나지 못했다. 그것은 이 도시에서는 진정한 형제애 가운데 풍성한 도움이 이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종교개혁 이전의 제네바에는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7개의 구빈원이 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를 선언한 이후 일곱 곳의 구빈원은 ‘종합구빈원(General Hospital)’으로 통합되었다. 이 구빈원은 집사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재정은 시의회가 모금할 책임이 있었다. 종합구빈원은 구빈원장과 4명의 행정관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모두 유급사역자들이었다.

종합구빈원은 분기마다 감사를 받았고, 매 주일예배가 시작되기 전인 아침 6시에 정기적으로 모여 한 주간의 빵 분배와 구제금의 지출에 대해서 보고하고, 교구에서 요청한 구제에 대해서 얼마의 빵을 나누어줄지를 결정하였다. 종합구빈원은 무려 300년 동안이나 존속했다. 그 이후에도 종합요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날에까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종합구빈원은 칼뱅이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니었지만, 프랑스 구호기금은 칼뱅의 주도로 시작된 구제사역이었다. 종합구빈원이 시정부의 공적구호기관이었다면, 프랑스구호기금은 민간구호기관으로 오늘날의 엔지오(NGO)와 같은 것이었다.

프랑스 구호기금의 정식명칭은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제네바로 피난 온 가난한 프랑스 외국인들을 위한 기금”(Bourse Française; Fund for Poor French Foreigners)이었다. 특히 1550년에서 1560년 사이에 제네바의 인구는 1만3100명에서 2만1400명으로 60% 이상 급증하였는데, 대부분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프랑스 피난민들이었다. 이 구호기금은 자발적 기부에 의해 재원이 마련되었는데 돈 뿐만 아니라 유산을 남기기도 하였다.

제네바에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직접 돈을 주기보다는 기부를 하였고, 구호기금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구호기금을 운영하는 집사들은 기부금을 모금하여 분배하고 가난한 자들을 심방하였다. 프랑스 구호기금은 가난한 피난민들을 위한 것으로 하룻밤 머무는 여행자를 위한 편의에서 질병이나 노령으로 인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왔다.

집사들은 제네바로 유입되는 종교난민들의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하숙집이나 여관을 구해 주기도 했으며, 정착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직업훈련 비용을 지불하거나 훈련을 받기 위해 필요한 연장 등을 구해주었다. 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유모를 고용하였고, 심지어 옷을 구입해주고 옷을 수선하기 위해 재봉사를 고용하기도 했다. 또한 자립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자금을 대출해주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도 재정을 사용하였다.

클레망 마로와 베즈가 시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시편찬양집을 출판하였고, 그 수입금은 전액 기금으로 편입시켰다. 또 프랑스로 선교사를 파송하는가하면 선교사의 남겨진 가족을 돌보는 일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성경과 시편 찬송가, 요리문답을 프랑스로 운송하기까지 하였다.

기금에서는 필요에 따라 고용한 교사나 의사 약사들에게 급료를 주었고, 피난민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아카데미의 목사후보생들을 고용하기도 하였다. 구호기금은 단지 프랑스 종교난민들에게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터키인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다른 언어권 공동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 기금, 독일 기금, 스페인 기금, 영국 기금이 조직되어 이것이 훗날 제네바가 국제적인 구호기관들을 중심지가 되는 배경이 되었다.

칼뱅은 이 구호기금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정기적으로 이 기금에 기부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기부를 권하기도 했다. 1554년 7월 1일에는 프랑스 기금을 관리하는 집사들을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 칼뱅의 집에서 모이기도 했고, 제네바목사회에서 1명의 목사를 기금의 운영을 돕기 위해 파송하기도 했다. 또 칼뱅은 라구에니어(Denis Raguenier)를 자신의 설교를 받아 적는 속기사로 임명하고 이 기금에서 봉급을 주었는데 이렇게 해서 출판된 칼뱅의 주석과 설교집을 비롯한 출판물의 수입은 다시 구호기금의 수익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564년 죽기 전 유언장에서 자신의 재산의 일부를 이 구호기금에 남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제네바교회는 단지 말씀만 설교되는 교회가 아니라 종합구빈원과 프랑스 난민구호기금을 통해 구체적인 구제가 실천되는 교회였다. 또 구제가 개인구제가 아니라 기부를 통한 공적인 기금과 복지전문가들의 손을 통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오늘 현대교회가 주목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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