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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①칼뱅과 제네바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순종의 신앙 없으면 개혁은 멀다

▲ 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의미 깊은 해에 개혁신앙의 원천인 칼뱅이 목회했던 제네바교회와 특별히 칼뱅이 회장으로 활동했던 제네바 목사회(The Company of Pastors in Geneva)에 대해서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존 녹스는 “제네바는 사도들의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다. 다른 지역들에게도 그리스도가 참되게 선포되지만, 이 도시처럼 생활과 신앙이 참되게 개혁된 곳을 나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본 제네바는 1556년의 제네바였다. 1536년 칼뱅이 처음 도착했을 때의 제네바는 신생기독교도시에 불과했다. 칼뱅은 제네바에 대한 첫 인상을 “내가 처음 이 교회에 왔을 때 거의 아무 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교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이 우상숭배와 관련된 그림을 태웠지만 진정한 개혁은 없었다. 그곳에서는 무질서 외에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민권조차 가지지 못했던 프랑스인 칼뱅을 제네바에 불시착하게 하시고 성경적이고 개혁적인 교회를 건설하게 하셨다. 칼뱅은 56년의 인생을 살았는데, 그 인생은 제네바를 분수령으로 전반기 인생 28년과 후반기 인생 28년으로 양분된다. 그의 인생 전반기(1509~1536)는 파리에 유학하며 철학 법학 신학을 공부하면서 참된 교회의 건설자로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인생 후반기(1536~1564)는 제네바에 불시착하고 잠시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한 것을 포함하여 자신의 인생을 다하기까지 생피에르교회에서 설교하고, 제네바아카데미와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제네바를 개혁교회의 요람으로 세우는 일에 모든 열정을 불살랐다.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주의 주교도시였던 누아용에서 제라르 코뱅과 잔느 르 프랑 사이에서 장 코뱅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그에게는 4명의 형제와 2명의 누이가 있었고, 칼뱅이 6살 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1531년에 출교를 당하여 죽고 형 샤를은 파문을 당하고 죽는다. 칼뱅은 성직록을 받으며 참사회가 운영하던 소년학교 까뻬뜨를 다녔고, 1523년 파리에 유학을 와서 공부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라틴식인 요아니스 칼비누스로 바꾸게 되는데 이것이 프랑스이름 장 칼뱅(Jean Calvin)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칼뱅은 라 마르슈 콜레주와 몽테규 콜레주에서 공부하고 오를레앙과 부르주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하나님은 장차 칼뱅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인문주의자로서, 신학자로서, 법학자로서 준비시킨 것이다. 또 칼뱅은 이 무렵 수비타 콘베르시오(Subita Conversio), 즉 갑작스런 혹은 예상치 않은 회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니콜라 코프의 팔복에 대한 만성절 연설문에 연루되고 앙굴렘에 피신하여 샤를 데스프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지내는데, 큰 서재를 갖춘 친구 뒤 티에의 집에서 <기독교강요>를 구상하게 된다. 그리고 1536년 바젤에서 마르티아누스 루키아누스라는 이름으로 지내면서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 라틴어 초판을 출판하게 된다.

이후 칼뱅은 종교적 박해로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하고자 마음을 먹고 조국 프랑스를 떠나지만 프랑수아 1세와 칼 5세간의 전쟁으로 인해 우회하면서 제네바에 머물게 되었다. 파렐의 간곡한 권고로 제네바에 정착하고 사역을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네바에 정착한 칼뱅은 <기독교강요>의 출판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제네바에서의 첫 해 칼뱅의 직책은 성경강사였고, 그는 단지 ‘그 프랑스인’으로 불렸다. 1559년에 가서야 비로소 제네바시민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칼뱅은 언제나 종교적 난민이자, 망명자와 나그네의 심정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칼뱅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1537년 2월 13일 시의회 회의록에 처음 등장한다.

칼뱅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이 있었다. 1536년 파렐의 부탁에 그는 순종한다. 그리고 1541년 다시 제네바의 초청을 받았을 때도 “나는 하루에 천 번 부서져야 했기에, 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차라리 백번 이상이라도 다른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의 마음이 죽은 것 같이 여기며 주님께 나를 제물로 드립니다”라고 고백했다. 지금 우리는 칼뱅에게서 개혁신학만 배울 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에 대한 전적이고 절대적인 순종의 신앙 역시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탁월한 개혁신학을 가졌어도 말씀 앞에 순종할 수 있는 신앙이 없으면 개혁은 요원하기만 한 것이다.

임종구 목사는 1996년 푸른초장교회를 개척해 개혁신학에 기반한 모범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 임 목사는 2015년 총신대학교 학위논문 ‘제네바 목사회(1536~1564)에 따른 칼뱅의 활동과 신학에 관한 고찰’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고, <칼빈과 제네바목사회>(부흥과개혁사)를 집필했다. 현재 임종구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신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예장합동 세계개혁교회교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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