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문

상단여백
HOME 설교 일반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⑬ 올바른 성찬 시행을 위해 몸부림치다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 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칼뱅은 제네바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많은 모범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성찬과 권징의 시행이었다. 칼뱅이 목숨을 걸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려 한 것은 말씀의 증거와, 정당한 성례의 시행, 그리고 이 두 가지 표지를 뒷받침하고 교회의 성결을 유지해줄 권징의 실천이었다. 한마디로 교회의 표지를 지키는데 타협하지 않았던 것이다.

칼뱅은 성찬의 필요를 처음부터 강조하였다. 1537년 기초법령에서도 성만찬이 아무런 경외감 없이 거행된다면 이것은 제대로 된 교회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성찬이 스스로 사악하고 불의한 삶을 살고 있고, 또 전혀 예수에게 속하지 않음을 공언하고 드러내는 자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경우 성례의 모독이며 우리 주님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단 칼뱅은 사도행전 2장의 모범을 따라 모일 때마다 떡을 떼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막 기독교국가를 선언한 제네바의 상황이 성찬이 자주 시행될 경우 이 거룩하고 탁월한 신비가 경멸될 위험이 있으며, 백성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허약한 백성이 견고해지기까지 한 달에 한번 설교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시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찬을 받기 위해서는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신앙고백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그런 사람만이 성례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신앙고백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고, 시의회는 기초법령을 거부했다. 결국 시의회는 베른식을 따라 1년에 네 번만 성례를 시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칼뱅의 교회건설의 첫 시도는 거대한 반발에 부딪혔다. 칼뱅도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성찬은 파행을 맞을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칼뱅과 파렐은 제네바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된다. 추방 직전인 1538년 베른의 주선으로 중재안이 만들어지는데 여기에서 칼뱅은 무교병을 사용하는 것과 세례수반을 허용하는 것을 양보하면서도 성찬은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타협안마저 거부당하고 추방되는데,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성찬의 시행횟수였던 것이다.

칼뱅이 제2차 제네바의 사역을 전개한 1541년의 표준법령에서는 1년에 네 번을 주장하는 시의회의 안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가을의 9월 첫 주일에 시행했고, 성찬상은 설교단 가까이에 배치시켰다. 성찬은 1주전에 공고되고 목사에 의해서 집례되었고, 어떤 경우도 목사없이 성찬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성찬은 교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는 집례될 수 없었다. 제네바의 교구에서는 교리문답과 세례를 받은 자들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시골교구의 경우에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게 하고, 예배시간에 늦은 사람에게는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성찬에 참여한 사람은 예배의 마지막 순서까지 참석하도록 했다.

칼뱅은 주의 성찬이 모독 받지 않게 권징을 통해 수찬정지를 시행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552년의 필리베르 베르틀리에(Philibert Berthelier)의 수찬정지이다. 베르틀리에는 페랭을 비롯한 제네바 시의회 의원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변호사였다. 그는 설교시간에 기침을 하는 방식을 통해 칼뱅의 설교를 거부했다. 그는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치리회는 그에게 수찬정지를 결정했고, 시의회가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수완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시의회로 하여금 치리회의 재심이나 해벌없이 권징을 해지했던 것이다. 칼뱅은 성찬을 앞둔 설교에서 이 문제를 강하게 언급했고, 모든 목사들이 항의했다. 그리고 회개의 증거가 치리회를 통해 승인되기 전에는 성찬을 받을 수 없다는 목사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담은 서신을 시의회에 전달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1553년 200인 대의회에까지 회부되고, 200인회는 시의회의 결정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목사회는 죽음으로써 베르틀리에의 성찬참여를 막겠다고 선언을 한다.

결국 치리회와 시당국자와 베르틀리에가 모였을 때 베르틀리에는 심히 모욕적이고 방종한 말로 거역했고, 시당국자는 그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명했다. 또한 필리베르 베르틀리에의 동생인 프랑수아 베르틀리에 역시 치리회에 소환되어서 악담과 자신의 형이 사탄으로 취급받고 출교당한 것에 분개했다. 치리회는 동생에게도 성찬을 금지했고, 프랑수아의 모욕적인 말에 대해 제소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1554년 3월 8일 이 두 사람은 몇 번에 걸친 치리회의 소환을 통해 순종을 요구하는 훈계를 듣고서 성찬 참여는 결국 허락된다. 베르틀리에 형제의 수찬정지와 해벌의 과정은 칼뱅과 목사회가 성찬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오늘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한다. 주의 만찬이 모독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음으로써 베르를리에의 성찬참여를 막겠다고 선언한 제네바목사회의 결정 앞에서 오늘 성찬과 권징, 그리고 교회의 성결을 지키는 일에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교회는 거룩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김병국 기자  bkkim@kidok.com

<저작권자 © 기독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병국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