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개혁자의 용기가 남아있는가

▲ 임종구 목사
(푸른초장교회)

전 세계가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삼고 기념하지만, 유독 스위스는 2019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개혁의 출발점을 츠빙글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종교개혁이 루터교회로 귀결되고, 스위스의 종교개혁이 개혁교회를 태동시켰다는 점에서는 일리 있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제네바 교회건설의 초기에도 베른식 종교가 제네바에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점에서 흐름을 같이 한다.

당시 스위스에는 제네바, 쿠어, 코스탄츠, 바젤, 로잔, 시옹 등 6개의 주교구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베른은 로잔교구를 흡수하고 제네바교구까지 넘보게 되었다. 결국 베른의 야망은 1536년 자신들의 군대를 제네바에 진출시킴으로서 이루어졌고, 베른은 제네바의 종교에 관여하게 된다.

제네바에서는 이미 1532년부터 베른에서 파송된 파렐, 앙투앙 프로망이 활동하고 있었고, 파렐이 생 피에르에서 설교하면서 성상은 제거되었다. 또한 그 해 12월에 시의회는 설교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은 모두 도시를 떠나는 것이 낫다고 공포했고, 새로 만든 주화에는 ‘어둠 후의 빛’(Post Tenebras Lux)이라고 새겨졌다. 그러나 베른 출신의 제1기 제네바 사역자들은 어떤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오기에는 미흡했다.

한편 로잔에서도 역시 베른의 입김이 작용했다. 로잔의 설교자로 임명된 비레와 카롤리를 보면 베른의 후원을 받던 카롤리는 연봉이 500플로린과 옛 참사원의 근사한 집을 사택으로 받은 반면, 정작에 개혁을 주도했던 비레는 그 금액의 1/3을 받았고 그나마 1559년에 면직되고 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자와 비레가 제네바로 돌아오고, 베른의 지시로 예정론을 강의할 수 없게 되면서 로잔 아카데미의 수많은 교수들이 제네바 아카데미로 들어오게 된다.

칼뱅은 1536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제네바 교회건설의 첫 삽을 뜨지만 불과 1년 7개월 남짓한 기간 만에 그의 제네바 제1차 체류는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그 모든 원인은 베른식 종교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베른과의 갈등은 제2차 체류기간에도 계속되지만 결국 제네바는 독일식도, 베른식도 아닌 마침내 제네바만의 개혁교회를 건설하기에 이르게 된다.

칼뱅은 1536년 11월에 교회설립시안(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대한 규정)을 제출하고, 이듬해 1월에 시의회로부터 수정된 안을 승인받고 1537년 2월에 칼뱅의 급여가 결정된다. 그러나 3월에 칼뱅은 처음으로 시의회에 소환된다. 설교 때 시의회를 일컬어 ‘마귀의 의회’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시의회는 이에 대해 경고하고 파렐과 칼뱅, 코르에게 행정에 관여하지 말라고 한다. 이와 같이 칼뱅은 개혁을 주도해 나가지만 한편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7월에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21개조의 신앙고백서를 1500부 인쇄하여 배포하고 서명할 것을 명령했지만 강제적 서약에 대해 시민들이 반발이 11월까지 이어졌고, 1538년 파렐과 칼뱅은 서약 불복자들에게 성찬금지를 선언한다. 그러나 그 해 선거에서 개혁 진영이 참패하면서 시의회는 베른 방식의 성찬을 결정하고 칼뱅과 파렐은 4월의 부활절 성찬식의 성찬 집례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고 결국 4월 23일, 200인 대의회는 칼뱅과 파렐, 코르 3명의 목사에게 72시간 내의 추방이라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제네바교회의 기초법령, 즉 교회설립시안을 보면 베른식 기독교와 칼뱅의 개혁 사이에 간극을 발견할 수 있는데, 가장 민감한 사안은 성찬의 회수였다. 칼뱅은 매번 모일 때마다 성찬을 할 것을 주장했지만, 시의회는 일방적으로 연간 4번으로 수정해서 승인했다. 또 4가지 미신적 축일을 폐지하는 것과 세례수반의 폐지, 무교병사용의 폐지에 대해서 제네바 시의회와 시민들은 정면으로 거부했다.

급기야 베른의 개입으로 72시간이라는 급박한 시간에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수정법령으로 불리는 타협안은 1538년 4월 27일 제출된다. 14개 항목의 수정안에서 칼뱅은 성찬을 월 1번으로 양보하고 세례수반의 사용과 무교병의 사용을 묵인하는 것과 4가지의 축일도 묵인하는 것으로 후퇴했다. 다만 추방이 철회되고 복직이 결정된다면 명예의 회복과 함께 설교가 보장되어야 하고, 충분한 목회자의 수급과 효과적인 목양을 위해 교구의 편성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미 성난 시민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고 5월 26일 추방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와 같이 칼뱅은 제네바의 교회건설 초창기에 교회의 표지를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시행으로 삼고, 교회가 서고 무너지는 것의 핵심은 성찬과 권징으로 생각했다. 칼뱅은 적어도 신앙고백서에 서명하지 않은 사람에게 잔을 줄 수 없었다. 1차 체류에서 칼뱅은 다소 서툴고 좌충우돌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참된 교회건설을 위해 물러나지 않았던 개혁자의 기개를 본다. 오늘날 우리의 성찬과 권징의 형편을 보라. 교회 성장이라는 구호에 가려져 버린 교회의 표어를 보라. 우리에게 개혁자의 용기가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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