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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4) 제네바교회, 세르베투스 제거하다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 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칼뱅 연대의 제네바목사회 회의록(RCPG)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기록물은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에 대한 기소와 신학검증 및 재판관련 문건이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출신인데 파리에서 학위를 받고 의사로서 유럽 최초로 혈액의 폐순환을 기술했고, 지리학에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했고, 1531년 <삼위일체의 오류>를 출간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로마가톨릭의 비엔공판과 제네바의 시의회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1553년 10월 27일 화형되었다.

16세기에 이단의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 수없이 많지만 유독 세르베투스사건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관용이라는 논쟁을 던져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칼뱅을 박해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제네바교회는 세르베투스를 제거했는가? 그 과정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53년 세르베투스는 <기독교 재건>을 출간했는데, 이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대항하는 작품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머리가 셋 달린 개’라고 불렀다. 또 유아세례를 악마적인 것으로, 또 자신을 미가엘 천사장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이름을 미카엘 세르베투스라고 불렀다. 1553년 세르베투스는 로마가톨릭에 의해 비엔에서 체포되어 화형에 처하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탈출하여 제네바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라 마들렌교회에서 체포되었다.

기소자는 칼뱅의 비서 니콜라 드 라 퐁텐이였고, 8월 17일 칼뱅이 목사회를 대표하여 고발에 대한 책임을 졌다. 목사회는 세르베투스의 글에서 이단적인 내용을 발취하여 기소문을 작성했고, 칼뱅은 38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최종 기소문을 제출했다. 또 스위스 각 도시에 공개질의서를 발송했는데 베른과 취리히, 샤프하우젠은 유죄를, 바젤은 보류의 의견서를 보내왔다. 그리고 1553년 10월 27일 화형이 결정되었다. 그는 죽는 시간까지도 그의 오류에 대한 회개의 징조를 보이지 않았기에 마침내 화형에 처해졌다.

1553년의 제네바의 정가는 세르베투스 사건과 아울러 필리베르 베르틀리에 사건까지 겹쳐 1555년 페랭파가 추출되기까지 제네바개혁의 갈등이 정점에 달했다. 특히 아미 페랭과 파브르, 방델이 포함된 수구세력들은 프랑스 유입망명자들과 함께 칼뱅을 제거하기 위해 목사회와 치열하게 싸웠다. 세르베투스는 칼뱅이 시의회와 베르틀리에 사건으로 출교권을 놓고 갈등을 벌이는 것을 이용하여 칼뱅을 이단자로 고발하면서 칼뱅도 수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자신이 칼뱅으로 인해서 잃었던 손해를 칼뱅의 재산으로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네바 정가의 실력자 베르틀리에는 세르베투스의 변호사로 나서면서 이 사건은 제네바 수구세력과 개혁파의 일대 격전장이 되었다.

당시 칼뱅은 아직 제네바 시민권조차 획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시의회와 수구세력의 조직적인 세르베투스 구명운동을 고려할 때 칼뱅이 세르베투스를 죽였다거나 제네바의 독재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16세기 제네바 상황에 대한 심각한 오독으로 보인다. 오히려 칼뱅과 파렐은 수차례 서신과 방문을 통해 세르베투스를 교화하였다. 또 극단적인 처형을 제고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시몬 마구스라고 비난했고 마지막 처형의 순간에도 성자의 신성을 부정하며 “예수여,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였다. 화형장까지 함께 갔던 파렐은 그가 예수를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고만 고백했더라도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에 대해 스위스 각 도시들뿐만 아니라 불링거, 멜랑히톤, 심지어 칼뱅의 반대파였던 제롬 볼섹까지도 처형을 지지했지만 세바스찬 카스텔리옹은 이단에게는 관용을, 신성모독자들에게는 추방이나 투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뱅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카스텔리옹의 주장을 인용한다. 칼뱅은 1554년 세르베투스의 처형 이후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오류에 대항하는 정통신앙의 변호’를 통해 자신이 왜 이단자들에게 사형을 행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는 극단적 이단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늑대를 살리기 위해 불쌍한 양떼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심각한 잔인함이라고 말하였다. 또 썩은 지체의 악취를 방치하여 그리스도의 온몸을 상하게 내버려두는 것과 잘못된 교리로 영혼들을 독살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칼뱅과 제네바교회는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부정하고 성자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르베투스를 제거하였다. 이것은 16세기의 상황에서 제네바가 아닌 다른 개혁도시에서라도 그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세르베투스사건을 통해 종교적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제네바 시의회의 단호한 결정과 동시에 정통신앙의 수호자로서 칼뱅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김병국 기자  bkkim@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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