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설교와 성찬, 타협하지 않았다
 

▲ 임종구 목사
(푸른초장교회)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고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다. 물론 그가 고백했던 것처럼 다시 제네바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에게는 1000번의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무렵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하루에 1000번 부서져야 했기에 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차라리 100번 이상이라도 다른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 외에 모든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의 마음이 죽은 것 같이 여기며 주님께 나를 제물로 드립니다”라고 고백했다. 이것이 칼뱅의 경건이자, 신앙이었다.

당시에는 편지를 쓰면 자신의 문장을 찍었는데 칼뱅의 문장에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라는 라틴어 구절과 손에 하트모양의 심장을 들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2장 1절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의 간증과도 같은 구절로 칼뱅이 다시 제네바로 돌아올 때의 각오가 담긴 것이다.

칼뱅은 1541년 9월 13일에 베른에 들린 후 제네바로 돌아온다. 제네바 시의회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호위 부대를 파견하고, 아미 페렝과 루이 뒤포어가 의전관 한 사람과 함께 대표로 스트라스부르까지 갔다. 10월 4일 시의회는 칼뱅의 대우를 결정했는데, 생피에르 근처의 샤누안 거리에 있는 포도주 저장창고와 정원이 딸린 집이 제공되었다. 칼뱅은 이 집에서 평생을 살았다.

또 그의 높은 학식과 방문객들을 맞이해야 하는 형편을 고려하여 당시 제네바 목사로서는 최고의 금액인 500플로린의 고정 급여와 12가마니의 밀과 250갤런의 포도주, 새 옷 한 벌과 겨울용 모피 코트를 제공해 주었다. 또 시의회는 세 필의 말과 마차를 보내어 칼뱅의 아내와 가구를 실어 오게 하였다.

1541년 9월 13일의 제네바 시의회록은 개혁자의 귀환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장 칼뱅, 복음의 사역자, 이 사람은 스트라스부르에서부터 이곳에 도착했는데, 스트라스부르 사람들과 목사들의 편지와 바젤 목사들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이 편지들이 낭독되었고, 그 후에 그가 자기가 늦게 온 것에 대한 약간의 변명과 사과를 했다. 그리고 그는 교회가 정돈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규칙을 제정해야 하고 또 규칙을 제정할 위원회를 선출해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은 언제나 제네바의 종으로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칼뱅은 돌아온 후 첫 주일에 지체 없이 그가 떠나기 전 설교했던 생피에르교회에서 설교했다. 사람들은 쫓겨났던 그가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 했다. 칼뱅은 1538년, 즉 3년 전 성경강해를 하다 중단했던 바로 그 장절로부터 성경강해를 이어갔다. 마치 그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난번에 이어”라고 말하고 설교를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불만이나 비판의 내용을 찾을 수 없는 설교였다. “다시 설교하러 갔을 때 사람들이 똑바로 앉아 있었다. 모두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일어났던 일과 그들이 정말 듣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모든 내용들은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사역의 본질에 대해서 몇 마디 했다.

믿음에 대한 짧은 간증과 함께 나의 의도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증언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기 전에 설교했던 본문을 강해했다. 가르치는 직분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가르치는 일을 방해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라고 칼뱅은 당시를 술회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치욕을 준 일당을 내 손으로 때려눕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했다. 칼뱅은 자신의 적을 친구로 만들고 싶었고, 자기 절제를 통해서 일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1451년의 교회법령을 만들 때 칼뱅은 “목사는 어떤 경우에도 사법적 권한이 없다. 목사는 오로지 말씀의 검만을 휘두를 수 있다”고 적어 넣었다. 칼뱅은 하나님께서 정치지도자에게는 위정자의 검을, 사역자들에게는 말씀의 검을 주신 것으로 이해했다. 설교를 결코 폭력이나, 자신의 방어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았다.

또한 그는 성례를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설교를 “귀에 들리는 말씀”으로 이해하였다. 성찬을 종교의식이나 행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수단이자,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이자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설교는 물론 성찬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증거와 성례전의 이행을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생명처럼 여겼다.

그러므로 성례는 단지 십자가의 사건을 상기시켜주는 것 이상으로 성례를 은혜의 수단으로 적용하였고, 말씀이 더럽혀지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성례가 더럽혀지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칼뱅은 1537년 교회법령을 제정할 때 성찬을 매주 예배에서 시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칼뱅은 말씀의 종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단지 설교 준비를 열심히 했다는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오늘날 인터넷이나 영상을 통해 보이는 설교가 넘쳐나지만 보이는 말씀은 설교 방송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찬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가 다시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을 회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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