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 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제네바교회는 국가교회의 형태를 가졌다. 이는 신성로마제국, 즉 당시 독일에서 제후의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였다면, 스위스는 시의회가 선택한 종교가 그 도시의 종교였다. 제네바는 1536년 시의회의 결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 옛 질서에서 종교권력을 주교와 교황이 가지고 있던 것을 시의회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네바목사회가 종교자문의 역할을 했지만,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시의회가 가졌다. 목사의 임면은 물론, 설교의 횟수와 사역을 할 교구까지 시의회가 결정했다. 목사들은 소위 목사안수가 아닌 시장 앞에서 서약을 함으로써 임직되었다. 심지어 출교권까지 시의회가 가졌다. 칼뱅과 제네바목사회는 출교권은 위정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열쇠임을 주장하며, 1555년까지 출교권을 교회로 가져오기 위해 투쟁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정치목사도 등장했다. 제네바목사회 회의록을 보면 수차례에 걸친 목사회의 면직요구에도 불구하고, 시의회의 힘을 등에 업고 끝까지 목사직을 유지했던 플리프 드 에클레시아(M. Philippe de Ecclesia)가 있다. 에클레시아는 1542년 제네바 목사로 임명되었다. 2년 후 방되브르(Vandoeuvres)에서 9년간 목회하다가 1549년에 견책을 받았지만, 결국 1553년에 가서야 면직되고 이듬해 생애를 마감한다.

목사회 회의록을 살펴보면 1549년 2월 15일 목사회는 에클레시아에 대한 어떤 혐의를 포착하고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소집된다. 그에 대한 기소내용은 금요일 오전에 정기적으로 회집되던 주간성경연구모임(Congregation)에서 명확히 규정된 교리를 전복시키고 모호하게 말하고 건덕에 어긋나는 어떤 주장을 고집하며 무익한 질문을 했다는 것이었다. 목사회는 그동안의 많은 어리석은 말과 부조리한 말, 잘못된 해석에 대한 목록을 만들고 그 앞에서 조목조목 읽었다. 에클레시아는 대부분 자신이 말한 것으로 인정하고 자백했지만 나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에클레시아의 혐의는 목사로서 기량부족, 불합리한 행동, 잘못된 설교였다. 그의 이런 행동은 과거에도 계속하여 지적을 받아왔고, 그의 잘못은 목록으로 만들어져 읽혔다. 에클레시아는 견책을 받았고, 목사회는 그의 설교사역을 중단시키고 변화를 주목하고 있었다. 다음 달인 3월에 열린 목사회는 에클레시아가 여전히 회개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고, 치리회에서 그의 혐의를 낭독했지만 그는 혐의를 부정했다. 그러나 시 지방장관인 피에르 티소는 그를 용서해주고 복직하라고 명령했다. 목사회는 그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항의했지만 이번에는 시 행정장관인 아미 페랭이 에클레시아를 불러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는 그의 복직을 결정했다. 목사회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다시 목사회에 포함시켜야 했다.

그러나 2년 후 에클레시아는 두 명의 처남에 의해 다시 기소된다. 그들은 자매를 학대하고 결혼 계약을 거부하며 자신의 가족들을 비방한다고 주장했지만 치리회는 두 사람이 화해할 것을 주문했다. 또 다시 1년 후 에클레시아는 당시 벽지 교구였던 쥐시(Jussy)에 임명되는 문제에서 시의회와의 친분을 빌미로 임지 발령을 거부했다. 목사회는 에클레시아를 쥐시에 배정했지만, 에클레시아는 시 행정장관의 명령없이 목사회의 결정에 따를 수 없다고 거부했다. 행정장관은 목사회의 조정안을 거부하고 에클레시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런 목사들의 임지조정이 난항을 겪는 중에 오지아스(Osias)라는 사람이 에클레시아를 고리대금업 혐의로 고소했다. 또 에클레시아가 제롬 볼섹과 친분이 있으며 지난 부활절 설교에서 편재설을 설교했다는 혐의가 추가되었다.

1552년 11월 14일 에클레시아 목사가 소환되었다. 제네바와 시골교구의 모든 목사들, 또 파렐과 비레까지 출석한 가운데 에클레시아의 고리대금업과 볼섹과의 친분, 볼섹의 교리에 호의적인 의견을 가진 것이 밝혀졌고, 변명이나 핑계를 댈 수 없었다. 시 행정장관 역시 그를 책망했다. 그러나 시 행정장관은 그를 한 번 더 용서하고 그의 직분을 유지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목사회는 그에게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고 주장한다.

다음 달 에클레시아는 돌연 행정장관 앞에 나아가 오히려 목사회를 고발했다. 행정장관은 또 다시 목사회로 하여금 에클레시아와 화해하라고 요구한다. 갈등은 극에 달하고, 칼뱅은 목사회를 대표해 그와 함께 성직자로 있을 수 없다고 요청했다. 결국 에클레시아 문제는 해를 넘겨 1553년 1월 17일 행정장관들과 목사회의 연석회의를 통해 최종 면직을 결정하고 해임을 선언한다.

정치목사 에클레시아 사건은 제네바교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수구세력이었던 아미페랭파는 지속적으로 목사회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런 구도 속에서 정치목사들이 시의회의 힘을 이용해 오히려 목사회를 공격했다. 이런 양상은 아미페랭파가 몰락하는 1555년에 가서야 끝이 난다. 제네바 목사회는 당시 국가교회라는 틀 안에서의 교회가 가지는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거룩과 성결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시 정부에 지속적으로 항의하고 치리회를 통해 자정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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