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실존’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신자의 실존’은 구원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출 12:42)

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
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

요즈음 윤여정 씨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이 큰 이슈입니다만, 30년 전인 1991년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장미희 씨의 첫 인사가 유명합니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이 말로 밤의 이미지를 즐거움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 후로 개그 소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압제 받던 이스라엘이 해방된 밤을 ‘여호와의 밤’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42절) 떨리는 밤이었습니다. 애굽에게는 처참한 시간이었지만, 먼지 취급을 받던 이스라엘이 제국 애굽을 크게 한 번 제압하고 그 땅을 떠나는 사건의 밤이었습니다. 실로 여호와의 밤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밤’이라는 이 말에 독특한 문학적 효과가 있습니다. 보통 성경을 읽을 때 같은 말이 여러 번 반복되면 그 말은 중요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여호와의 밤은 매우 그럴싸하고 멋드러지고 낭만적이고 거룩하기조차 한 말이라서, 성경에 자주 나올 것 같지만 성경 전체에서 딱 한 번 여기에만 나옵니다. 많이 쓰여서가 아니라 딱 한 번만 나옴으로써 특별합니다. 구약성경 최대의 구원사건이 이 밤에 일어났고, 이 밤은 여호와의 밤이라고 이름 붙여졌습니다. 이 말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옵니다. 단 한 번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그런데 이 구원의 밤에 어떤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까? 제가 2년쯤 전에 다문화선교에 대한 논문을 하나 썼습니다. 그때 한국에 들어온 다문화인들의 생활방식을 우리에게 애써 동화시키지 말고, 그들의 문화를 살리는 다문화의 상호성에 힘을 쏟자고 했습니다. 저는 논문에서 다시 그 상호성을 넘어서, 다문화인들의 실존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실존이 확보되어야만 삶이 온전히 확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저 자신도 약간은 추상적이었는데, 이게 맞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존은 알고 보면 현재 삶의 전체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는데, 그 해방은 어떤 의미의 해방입니까? 그 해방은 이스라엘에게 실존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존이 뭐냐에 대해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에 대하여 머리로 깨닫는 것으로는 사람을 전부 말할 수 없다. 세계가 아니라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성과 함께 마음의 상태에까지 도달해야 비로소 사람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다. 세계를 이성적으로 깨닫는 것은 옳은 것을 알려 주겠지만, 그 옳은 것을 알고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인간에 대해서는 온전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삶과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해야 한다.”

특히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죄성과 감정에 대해서 절절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뻔히 옳은 길을 알면서도 그릇된 길을 가기도 하는 인간의 모습까지 합쳐서 인간을 알려면, 지금 나 자신에 대하여 이성을 넘어 마음의 상태에까지 도달해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부된 현재의 사건에 주목해라.”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가 말하는 실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실존을 챙기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또 한 번 하나님에 대하여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시는 혁명적 인상에 주목해야겠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실제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32절을 보십시오. 바로는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소도 몰고 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쉽게 나온 말이 아닙니다. 바로가 모세에게 계속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기 시작하자 바로는 계속 모세에게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애들도 두고 가축도 두고 어른들만 나가라 했습니다.(출 10:9~11) 그 다음에는 가축은 두고 애들만 데리고 가라 했습니다.(출 10:24) 모세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또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었는데, 이제 그들의 장자가 죽는 재앙을 겪게 되니 할 수 없이 모두를 데리고 나가라 말하는 겁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광야 족속들의 결혼법이 이 말의 현실적 의미를 알려줍니다. 많은 소를 준비해서 장인에게 주고, 아내를 사다시피 데려갑니다. 아내가 살림 밑천이라고 보고, 소로 그 값을 쳐주는 겁니다. 가축이 큰 재산이라는 말이죠.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이렇게 살림을 챙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34절에는 떡 반죽 그릇이 나옵니다. 요즘은 떡 반죽 그릇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떡 반죽 그릇은 중요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복 받는 사람들에게는 떡 반죽 그릇에 복이 임한다 했습니다. 신명기 28장 1~6절입니다.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떡 반죽 그릇은 곡식을 조리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실존에서 최종적 중요성을 가진 물건이었습니다. 이 떡 반죽 그릇 말씀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밥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 다음으로는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은금 패물이 광야에서 가치가 별로 없었겠지만, 이것은 아마도 화폐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옷은 의식주에서 ‘의’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내시면서 돈을 챙겨 주시고, 옷도 챙겨 주시고, 먹을 것을 챙겨 주시고, 가축으로 생업과 재산을 함께 챙겨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집인데, 그것은 가나안 땅에 정착함으로써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바로 지금 현장의 삶을 주셨습니다.

최근에 저희 교회를 거쳐간 한 사람과 교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저희 교회가 지금까지 견디고 있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번듯한 교회들이 많이 있고 하나님 말씀도 그들을 더 지지하는 것 같지만, 우리 같은 작은 교회가 힘들지만 견디며 서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교회와 목사의 존재가 자기 믿음에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는 저에게 신앙을 묻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교회의 실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지만, 좀 더 성장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조금씩 자라고 또 약해지고 그랬지만, 그럼에도 살아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교회다운 교회로 서고, 또 살림을 해내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죠. 그런 면에서 많은 작은 교회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매우 비슷합니다.

애굽 장자의 죽음도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사실 너무 처참합니다. 그 시절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더이상 추적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제 애굽은 실존을 갖추려는 이스라엘의 노력에 그 어떤 방해나 장애도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실존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존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신자들에게 당장의 실존을 허락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미래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처럼 은금 패물을 얻어서 조금이라도 풍족하다면 더없이 좋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각 교회의 현재와 지체들의 살림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까? 뿐만 아니라 약한 중에도 이웃과 세상의 약함을 돌아보게 하시지 않습니까? 당장 충분하지 않아도, 이것이 우리의 미래지향입니다.

우리는 죄인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고, 또 주님이 행하시던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이제 좀 더 잘하는 것이 남아 있죠. 요즈음 믿음의 자녀들이 사는 것을 너무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목사로서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합니다. 이제는 그런 일도 고민하는 것을 우리의 실존으로 알고 어렵지만 노력합시다. 그 어떤 곤경에서도 지키신 하나님께서 길을 주실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구원은 큰 혁명적 사건이었지만, 그래도 그 구원의 실체는 매우 실존적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살 수 있는 기초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교회의 실존을 그렇게 세워가실 것을 믿습니다. 지체들의 실존과 미래를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교회다움을 실제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살림도 바르고 복된 현실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유월절 구원사건을 찬찬히 들여다본 후에 깨닫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바로 유월절 이 밤에 제자들과 식사를 나눈 다음, 제사장의 사병들에게 테러를 당하여 끌려갑니다. 그리고 그 밤에 이스라엘을 넘어 인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복음서의 이 밤은 참담합니다. 이 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 달아나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이 밤을 다시 한 번 엄청난 구원의 날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창조의 영광과 믿음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실존은 늘 밤과 같은 죄와 불안을 안고 있습니다. 절망적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밤을 넘어 구원은 선명해집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밤조차 밝습니다. 절망도 여호와의 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실존에 떠밀려 오는 삶의 어두운 밤을 믿음으로 돌파하는 신자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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