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설교]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고(요 3:30)
[이 주일의 설교]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고(요 3:30)
이원태 목사(안동옥동교회)
  • 김병국
  • 승인 2020.10.27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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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예수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조연으로 살아갑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원태 목사(안동옥동교회)
이원태 목사(안동옥동교회)

바다에서 조각배를 띄우며 고기를 잡는 늙고 가난한 어부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는 이웃 소년 ‘마놀린’을 조수로 삼고 함께 배를 타는 것이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84일 동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자 사람들은 산티아고를 향하여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조수로 일하던 마놀린의 부모는 산티아고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는다며 다른 배에 조수로 보냅니다. 이제 산티아고 노인은 홀로 먼 바다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낚싯대에는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가 걸립니다. 사흘간의 사투 끝에 노인은 대어를 낚아 집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달려들었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 노인은 다시 한 번 목숨을 건 사투를 벌입니다. 겨우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가 잡은 고기는 상어 떼의 공격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노인은 지친 몸을 이끌고 언덕 위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가서 정신없이 잠이 듭니다. 노인이 잠든 사이 소년은 노인의 상처투성이의 손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관광객들은 머리와 꼬리만 남은 큰 물고기를 신기한 듯 구경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산티아고가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해도 다시 배를 띄우는 이유는 바다가 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넓은 바다, 큰 고기와의 싸움, 상어 떼와 벌이는 사투.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빈손이 되어 버리는 결말. <노인과 바다>는 망망대해에 한 척의 배처럼, ‘던져진 존재’의 참 쓸쓸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세상으로 ‘보내진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에 보내진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보내어진 세례 요한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세례 요한은 나이가 많은 부모 사이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난 외동아들입니다. 그는 30세가 되도록 일반 젊은이들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광야에서 살았고, 포도주는 평생 입에도 대지 않았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30대 초반에 벌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주목하는 선지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순교의 제물로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 본문을 원문으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분은 커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감소되어야 한다.” 오늘날은 무한경쟁 사회입니다. 그리고 자기PR(Public Relations) 시대입니다. 다른 사람을 패배시키고 내가 올라서는 시대입니다. “내가 흥하고 너는 패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고” 이것이 세례 요한의 ‘인생관’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두 부류의 신앙인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가 흥해야겠다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가 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은 흥하고, 나는 쇠하는 인생관으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을까요?

첫째, 평생 예수님을 드러내며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예수님의 소리였습니다.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요 1:27) 그는 예수님보다 앞서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만 높이며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평생 예수님을 예비하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예비하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요 3:28)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29절을 보세요.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 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랑이신 주님이 오시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정성껏 혼인 잔치를 준비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혼인 잔치를 준비하는 신랑의 친구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그의 삶이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이것이 세례 요한의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이 최고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평생 예수님을 드러내는 길을 걸었던 세례 요한의 삶이 투영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평생 조연으로 살았습니다. 주인공이 나타나면 조연은 사라집니다. 조연의 역할은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심을 준비하고, 예수님이 오신 것을 보고 나서는 소리 없이 사라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집중되게 하는 조연 역할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언제든지 예수님을 주연으로 세우고 자신은 조연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나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높이는 조연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만 드러나고, 주님만 높임 받고,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봉사를 해도 주님만 높여야 합니다. 수고를 해도 주님의 이름만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이 조연의 역할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조연으로 신앙생활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영광스럽게 세워집니다. 모든 일에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앞세울 때에 교회의 사명은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머리이신 주님의 뜻을 품고 조연으로 섬기면 그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나도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평생 조연으로 살아가면서 복음의 향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평생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사람이 먼저 태어났다는 것은 기득권을 먼저 가졌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터득하는 일이지만 기득권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큽니다. 직장도 먼저 들어온 사람이 유리할 때가 많습니다. 승진도 먼저 할 기회가 있고, 그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세례 요한은 출신 배경이 좋았습니다. 당시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 세례 요한이 훨씬 좋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목수 집안 출신입니다.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이 고향에서 말씀하실 때에 “목수 주제에 무슨 말을 하느냐”며, 고향 사람들이 배척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정도로 비천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현직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아론의 자손으로 제사장 가문입니다. 당시 제사장은 세습제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기득권자입니다. 미래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제사장직이 자동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 기득권을 포기합니다. 야인으로 광야로 나아갑니다.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걸치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그 시대를 향하여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교회는 회개한 자들이 모여 천국을 경험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어떤 한 기능이 모든 것을 다 장악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기능이 연합하여 하나의 몸으로 기능을 다합니다. 우리의 몸은 교회를 투영하는 실물입니다. 따라서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①통로를 열어 준다는 것이고, ②내가 섬긴다는 뜻이며, ③서로가 함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을 경험하는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보내진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례 요한은 평생 예수님을 드러내며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평생 조연으로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평생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인생관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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