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수 목사(원주중앙교회)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숨은 공로자 ‘희생타자’가 됩시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삼하 11:11)

오성수 목사(원주중앙교회)
오성수 목사(원주중앙교회)

야구에는 ‘희생타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번트함으로 자기는 1루에서 아웃되지만, 선두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임으로 자기 팀을 승리로 이끌게 하는 선수입니다. 야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화려한 안타나 홈런을 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팀을 위해 번트로 자기를 희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팀이 지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팀이 승리해야 자신의 기록도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설사 실책이 있어도 팀이 승리하면 그것으로 인해 선수들의 실책도 묻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아 장군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희생타자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군사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때, 다윗은 홀로 예루살렘 궁궐에 있었습니다. 왕으로서 위치가 굳건해진 다윗은 더이상 위험한 전쟁에 나가지 않고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온 이스라엘이 전쟁 중인데 어찌 나만 집에 가서 편히 쉬리이까?”라는 아름다운 고백을 한 우리아는 자신이 충성한 다윗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간혹 역사는 정의와 함께 흐르지 않고 불의와 함께 역류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불륜의 주인공은 죽지 않고, 충직하고 믿음직한 용사 우리아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죠. 우리아의 충성스런 고백이 제 가슴에 ‘쿵’하니 던져지고 난 뒤, 저는 억울하게 죽은 우리아에 대해서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사무엘하 23장 8절 이하를 보면, 거기에는 다윗의 용사 37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혼자서 800명과 더불어 싸워 이긴 요셉 밧세바의 이름이 나옵니다.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고는 우물물을 길어 온 세 용사도 있었습니다. 이토록 다윗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싸운 충성된 용사들의 이름이 쭈욱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를 구축했던 다윗 왕의 이면에는 이렇듯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충성한 믿음의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용사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누가 언급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사무엘하 23장 39절을 보십시오.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성경이 다윗의 용사들을 기록하면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이 바로 헷 사람 우리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아내가 욕보임을 당한 지도 모르고 다윗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며 전쟁에 나갔던 우리아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충성을 바쳤고 신뢰했던 자에게서 배반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다윗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윗만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의를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온 이스라엘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스라엘의 별이지 않습니까? 이런 성경퀴즈를 내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남의 아내를 임신시키고 그 남편을 살해한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일까요? 바로 이 사람이 다윗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우리아는 왕을 진심으로 섬기려 했고 동료들과 함께하려 했건만, 그 왕(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우리아를 역사에서 지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다윗이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하면 되지만 우리아는 뭐가 됩니까? 이것이 남의 일일 때는 우리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아처럼 억울하고, 설명이 잘 안 되는 삶이 우리의 현실 가운데 종종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천국에서 다윗과 우리아가 만날 터인데 그들의 만남은 어떠할까 생각해봅니다. 다윗은 뭇 백성들로부터 성군이요 위대한 신앙인으로 존경과 칭찬을 받겠지만, 우리아 앞에만 가면 간음자요 살인자로서 고개를 들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우리아라는 이름 앞에만 서면 다윗은 움츠러들고 꼼짝 못할 것입니다.

그 이름은 다윗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이름이요, 다윗의 사악함과 수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만약 성경에 우리아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다윗을 인간적인 영웅으로만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아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다윗같이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우리아를 언급한 것은 다윗을 비난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왕상 15:5)

우리아의 이름을 읽을 때, 우리는 모두 숙연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아 사건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진 우리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1)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맙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 1:6)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밧세바’라고 해도 되는 것을 굳이 우리아의 아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1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우리아의 아내 외에도 네 명의 여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마리아가 그들입니다.

다른 여인들은 모두 실명으로 기록하면서, 유독 밧세바만 실명이 아닌 우리아의 아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했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고 하면서, 다윗에게는 왕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습니다. 솔로몬도 왕이요, 르호보암도 왕이지만 그들에게는 왕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마태는 이스라엘에 있어 다윗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다윗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부끄러운 수치를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마태가 우리아의 아내의 이름을 몰라서 그렇게 기록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는 이것을 통해 다윗과 같은 사람도 이러한 치명적인 허물과 죄가 있음을 말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태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 우리아를 잊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희생한 우리아를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족보에 우리아의 이름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아의 입장에서 너무 억울하다고만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다윗 되게 했던 사람이 바로 우리아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아가 아니었다면 다윗은 자신이 모태에서부터 이미 죄인으로 잉태했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시편 51)

사울 왕으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 다니면서도 보복하지 않은 다윗은 자신이 보기에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그토록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보다 더 악한 짓을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다윗은 발견한 것입니다. 그토록 의로웠던 우리아에게 도저히 못할 짓을 했습니다. 부하의 아내를 간음한 것도 모자라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이 다윗은 왕으로서 온갖 위엄을 부리며 자신이 우리아를 죽게 하고는,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라고 하면서 우리아의 죽음을 위장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통렬한 책망을 듣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다윗은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아 사건에서 이제까지 상상도 못했던 다윗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악 된 존재인가를 발견하고는 침상을 적시며 울며 회개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아는 비록 다윗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자신을 죽인 다윗을 메시아의 조상으로 우뚝 세우게 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결국 자신은 아웃 되지만, 다윗으로 화려하게 홈을 밟도록 만들었습니다. 너무도 충직했던 우리아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다윗을 메시아의 조상으로 우뚝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너도나도 화려한 안타와 홈런만을 쳐야 성공했다는 성공주의에 물든 시대입니다. 하지만 희생타자와 같은 우리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성경적 조망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내가 행한 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현실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좌절하거나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희생타자와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메시아의 왕조가 세워지는 이면에는 숨은 공로자인 우리아와 같은 희생타자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십니다.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의의 면류관으로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했던 신실한 고백이 우리를 영적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영적 전투를 치르고 있는 마당에 나 혼자만 편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따뜻한 아랫목에서 안일한 삶을 즐기기보다는 힘겨운 선교의 현장에서 주님과 함께 영적 전투를 치르는 성도가 되십시오. 성공주의에 물들지 않고, 살든지 죽든지 신실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하나님의 군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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