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교목회신학전문대학원교수)

민족과 이웃을 마음에 깊이 품고 사는 신자가 됩시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교목회신학전문대학원교수)
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교목회신학전문대학원교수)

우리나라는 한이 많은 나라입니다. 미국의 목회상담학자 임마누엘 라티가 미국 한인교회의 문화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한국계 미국 신학자 앤드류 성 박(Andrew Sung Park)에게서 차용하여, 정과 멋 그리고 한으로 한국 정서를 정리했습니다. 이 미국 기독교인 상담가의 연구는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그는 어쨌든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았던 우리의 역사와 정서를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 안에 그렇게 품어낸 것입니다. 그런 시선으로 우리의 5월과 6월을 보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이 5월에는 민주화의 열기와 역사적 대의와 그 안에 서린 한을 다독였습니다. 6월에는 나라를 지킨 젊은 피들의 흔적이 절절합니다. 개인적으로 저희 아버지께서도 군인으로서 6·25의 시대를 건너왔다는 것에 깜짝 놀라며 되돌아봅니다. 우리 민족은 그때를 살아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고, 기독교인이었다면 그 일로 기도해야 했습니다. 6월 호국의 피와 흙먼지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으로 만져주어야 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민족의 미래도 보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애끊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삼손은 건달 같았지만, 민족을 사랑하고 끝내 그 일로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땅을 사랑하고, 이 땅 사람을 사랑하고, 여기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을 안타까워하면서 성경의 삼손 기사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서 가장 큰 적이 블레셋이었습니다. 삼손의 적수도 블레셋이었습니다. 삼손 기사는 사사기 13~16장에 걸쳐 있는데, 삼손의 출생기와 성장기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완전히 눌려 있었습니다. 삼손의 단 지파는 존재감이 미미했습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자식도 없었습니다. 마노아의 인생 자체가 이스라엘의 축소판처럼 하나의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그에게 빛을 주었습니다. 아들 수태를 고지하면서 태어나면 나실인으로 살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술과 여자를 찾아 블레셋 사람들의 거주지역에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여자 들릴라에게는 자신의 머리카락 비밀까지 가르쳐주고, 결국 블레셋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엄청나게 죽이게는 되었지만, 그 끝에 자신도 죽습니다. 나실인의 규례를 모조리 어기면서 제멋대로 살다가 죽은 것이죠. 그러나 그 어두운 때에 하나님은 이 제멋대로인 나실인 삼손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에게 해방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영화 <쉰들러리스트>를 생각했습니다. 쉰들러는 부패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사업가였던 그는 유대인 노동자를 공짜로 쓰려고 유대인 수용소의 독일군 수용소장과 커넥션을 맺었는데, 나중에는 모든 재산을 털어 뇌물을 주고 유대인들을 구출해 냅니다. 그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기회주의자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솟아난 순수한 사랑으로 1098명의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져냅니다.

삼손도 일면은 쉰들러와 같았습니다. 도덕적이지도 않고 신앙이 가득하지도 않았습니다. 기회만 되면 부패의 냄새가 나는 블레셋 사람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선사합니다. 본문 16장 30절입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성경은 사사기 14장 4절에서 삼손의 이 모든 행적이 하나님 뜻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다.” 그렇다면 정당화될 수 없는 삼손의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때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은 어둡고, 그 백성 중에 어려움을 해결할 만한 인물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방탕한 사사 삼손을 들어서 백성의 숨통을 틔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끝내 중요한 것은 삼손보다는 그 백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오기도 합니다.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방탕한 사사 삼손을 들어 그 백성을 구원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통치의 신비가 존재합니다. 좀 다른 예이긴 하지만,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정말 파격적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신비가 있고, 때로 우리는 그런 신비로 힘입습니다. 크기와 느낌은 달라도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누구나 이런 신비로 구원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이십니다.

이 본문을 보며 우리도 최소한 삼손처럼 흔적을 남기거나 윤리적으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가 어떻든지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끝내 은혜를 주십니다. 신자의 삶이 그렇듯이 20세기 우리 국가의 운명도 내내 그래왔던 것 같습니다. 합방과 해방, 분단과 전쟁, 그리고 끝나지 않은 분단은 여전히 한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은혜를 기다립니다.

삼손이 블레셋의 세 여자와 보낸 시간은 의외로 짧은 기간입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의 사건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사사생활이 20년이라고 했는데, 삼손의 존재 자체가 블레셋에게 위협이어서 그를 죽일 기회를 노렸고, 삼손이 유독 블레셋 여자들을 좋아했던 것이 불행의 실마리였으며, 그는 결국 이 일로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적과의 동침’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참 간결합니다. 이미 말씀한 사사기 14장 4절입니다.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삼손이 첫 아내를 얻은 일의 평가입니다. 블레셋 여자들이 삼손에게는 유혹이었지만, 삼손도 그 여자들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물고 물리는 관계죠. 삼손이 처음 아내를 얻었을 때 그는 이미 사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사기 13장 25절에 삼손의 사사 이력을 추정할 만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이 구절에서는 지명도 명확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였다는 말은 사사 활동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 말입니다(삿 3:10 등). 그래서 삼손은 40세는 넘은 정도에 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삼손은 젊은 나이에 사사가 되었고, 초기에는 블레셋에 눌려서 살았습니다. 상황 극복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야 했지만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블레셋 여인과 혼인함으로써, 블레셋을 응징할 기회를 잡으려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14~15장에 나오는 블레셋 여인과의 혼인에서는 자신이 사사라는 삼손의 의식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시 블레셋 주거지로 들어가서 연속으로 관계를 만들 때는 삼손 자체로는 개인적 타락에 많이 빠져든 것 같습니다. 삼손으로서는 스스로를 포기한 것 같은 이 시기에도, 하나님은 그를 놓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마지막 기회를 얻어서 블레셋을 크게 물리칩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사시대 200년의 어두움을 물리치도록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회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삼손의 역할이었습니다. 그의 시대는 단신으로 백성을 구해야 할 정도로 풍전등화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오직 삼손이 있을 뿐인 상황에서, 삼손은 엎치락뒤치락했습니다. 그러다가 삼손은 블레셋의 큰 패배와 함께 스스로도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 자체가 굉장히 영웅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장엄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그러고 나면 머지않아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이 나타날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대에 도달하기 직전, 그 어둠을 홀로 밝힌 빛이 삼손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부패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빛으로 사용했습니다.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선명해지고 나면, 28절에 나오는 삼손의 부르짖음이 훨씬 더 잘 이해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이 말씀이 나올 즈음에 삼손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역할을 완전히 일치시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생 제대로는 통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과 완전히 뜻이 통했습니다. 거듭 부르짖었습니다.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소서. 나를 강하게 하소서.” 정말 우리도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용사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하나님 뜻을 깨달은 기도였습니다.

그냥 감각적으로 외쳐보자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용사의 기개를 주소서.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사용되게 하소서.” 우리의 참된 나라는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궁극의 가치를 향하여 가는 가운데 민족적으로 혹독한 시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하면서, 그것에다 하나님 나라라는 궁극의 가치를 매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국가와 사회와 민족과 이 땅과 형제와 이웃을 마음에 깊이 품고 살아가는 신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사는 신자들의 삶입니다. 민주화의 역사와 호국의 열기를 그리스도의 돌봄으로 받아내는 신자들로 삽시다. 그러면 교회와 국가와 인류까지 품어내는 교회로 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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