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하 목사(예수사랑교회)

하나님은 은혜의 손길로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창 38:25)

김진하 목사(예수사랑교회)
김진하 목사(예수사랑교회)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성의 이름이 다섯 번 나옵니다. 이 다섯 명은 사실은 모두 문제가 있는 여자들이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고,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이었으며, 룻은 이방 여인으로 모압 태생이었고, 밧세바는 우리아 장군의 아내였으며, 마리아는 정혼한 상태에서 임신한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이라는 거룩한 경전 속에 왜 이런 스캔들을 남겨놓았을까요?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37장부터 시작됩니다. 37장 마지막 절에서는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그가 팔려갔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38장에서는 생뚱맞게 요셉의 형인 유다의 섹스 스캔들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다가, 39장부터는 다시 요셉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의 인생스토리를 설명하다가 전혀 상관도 없어 보이는 유다의 지저분한 섹스 스캔들을 왜 TV 광고처럼 중간에 집어넣은 것일까요?

제주도에 가면 미로공원이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입구로 들어가지만 나오는 출구까지는 말 그대로 미로입니다. 출구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 돌며 돌고 헤매다 나올 때쯤이면 정말 진땀이 납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어디가 길인지 다 보입니다. 성경 한 장 한 장, 한 구절 한 구절을 읽노라면 미로처럼 이해되지 않다가도 성경 전체를 한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 이유와 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얼핏 보면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불륜스토리처럼 보입니다.

유다가 누구입니까?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자요 맏아들인 르우벤은 당연히 장자계승 서열 1위였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불행하게도 서모였던 빌하와 통간을 하여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장자권 선택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의협심 있는 아들들이긴 했지만, 누이동생 디나의 일로 할례를 빙자하여 세겜족을 몰살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이들도 장자권에서 멀어졌습니다.

결국 장자권은 넷째 아들 유다에게로 자연스레 넘어갔습니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데려다 동침하므로 이방여인과 결혼하였고(창 38:2), 그 여인에게서 엘, 오난, 셀라 등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 아들 모두를 계보에서 탈락시키셨습니다. 큰 아들 엘을 다말이란 여인과 결혼시켰지만, 엘은 하나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그의 생명을 데려가셨습니다.

유대의 풍습 중에는 ‘계대결혼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형이 후손 없이 죽으면 동생이 그 계보를 이어주는 관습법이었습니다. 엘이 죽자 자연스럽게 둘째아들 오난을 형수 다말에게로 장가보냈습니다. 그러나 오난은 형의 자녀를 낳아주는 것을 원치 않아 땅에 설정하므로 하나님이 악하게 보아 즉사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두 형제가 졸지에 죽고 이제 막내아들 셀라만 남았지만 셀라는 아직 어렸습니다.

유다는 어린 것을 핑계 삼아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면서 셀라가 성장하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이것은 핑계였습니다.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창 38:11) 유다는 두 아들이 졸지에 죽는 것을 보고 며느리가 두 아들을 잡아먹었다고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세월이 흘러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며느리 다말을 다시 부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유다의 아내였던 가나안 여인이 죽었고, 유다는 양털을 깎기 위해 딤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너울로 얼굴을 가린 채 길에 앉아있는 몸을 파는 여자를 만나 삯을 주기로 약조하고 하룻밤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그 여인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그 여인은 몸 파는 사람으로 변장한 며느리 다말이었습니다. 얼마 후 약조한 삯을 주기 위해 친구를 딤나로 보내어 그 여인을 찾으려 했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여기의 창녀라는 칭호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조나’라는 말로 ‘몸 파는 여자’ ‘창녀’라는 뜻이었고, ‘크데솨’라는 말은 ‘거룩히 구별된 여자’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크데솨는 이방신이었던 아스다롯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여자들이었는데, 아스다롯은 생육과 번식을 관장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크데솨와 교제한다는 것은 종교적 의미로 합법적인 매춘이었습니다. 다말은 자신을 몸 파는 여자인 ‘조나’로 변장했지만, 유다는 그 여인을 볼 때 ‘크데솨’로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으면서도 이방신인 아스다롯을 섬기는 여자들과 합법적 매춘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석 달쯤 지나 “너의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더라”라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유다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명했습니다.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마침 두 아들을 잡아먹은 다말에게 셋째 아들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다말이 임신을 했다니 합법적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호적에서 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당시 관습법에 의하면 불법적인 간음을 발견하면 돌로 쳐 죽이거나 불에 태워 죽여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말은 결정적인 순간에 유다에게서 받았던 담보물인 도장, 끈, 지팡이를 내놓았습니다. 유다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유다는 며느리와 동침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했던 일들에 대하여 스스로 합리화를 시켰던 유다였습니다. 셋째 아들이 장성하면 부르겠다고 철석같이 약조를 하고서도 셋째를 잃을 것이 두려워 다시 부르지 않았던 유다였습니다. 창녀와 하룻밤을 지새우면서도 양심의 가책 없이 대가만 치루면 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그였습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나, 섭리, 경륜, 이런 것들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환경이 그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오기만을 기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위로 르우벤, 시몬, 레위, 세 형들이 모두 장자권을 뺏기고 자신에게 거룩한 장자권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도 불신앙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이방 여인과 거리낌 없이 결혼했고, 철석같이 약속한 것도 밥 먹듯 거둬들였습니다. 길거리의 여인과도 크데솨인 것을 알고도 겁없이 동침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며느리가 임신했다고 하자, 불같이 화를 내며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가 바로 유다였습니다.

다말은 배가 불러왔고 때가 되자 아이를 낳았는데 쌍둥이였습니다. 출산할 때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는데 어미의 태문을 열고 아이의 손이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산파는 얼른 그 아기의 손에 붉은 줄을 묶어주었습니다. 장자라는 표시였습니다. 머리가 먼저 나와야 하는데 손이 먼저 나왔으므로 그 손을 다시 밀어 넣었더니, 순서가 바뀌어 뒤에 있던 아이가 먼저 밀치고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산파가 소리쳤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터트리고 나오느냐?” 그리하여 그 이름을 ‘베레스’라고 지었고, 뒤에 붉은 줄을 묶은 아이가 나왔으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고 지었습니다. 장자의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유다는 쌍둥이 두 아들을 며느리 다말을 통해 얻었는데, 그 이름을 베레스와 세라라고 지었고 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마 1:2~3) 결국 가나안 여인이 유다에게 낳아주었던 세 아들은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불륜의 여인이었던 다말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가 족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섹스 스캔들이었던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출생한 베레스를 통해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지만 장자의 대상은 때로 하나님의 뜻대로 바뀌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에서가 형이었지만 장자권은 야곱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손을 바꾸어 기도함으로 동생 에브라임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새는 여덟 아들을 낳았지만 장자권은 막내였던 다윗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는 압살롬이 죽고, 아도니아가 왕위 서열 1순위였지만 왕권은 사생아로 태어난 솔로몬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은혜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대가를 치르지 않고 값없이 받은 은총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내가 죽도록 노력했거나, 값을 치르고 받은 것이라면 은혜가 아니라 대가입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보면서 함부로 판단하거나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려와 바다의 파도가 집채만하게 몰려왔다 가는 중에도 바다의 밀물과 썰물은 정확한 시간에 바닷물을 움직여갑니다. 몇날 며칠 먹구름이 끼어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쏟아져도 태양은 정확한 시간에 떴다가 집니다. 지구촌 곳곳에 전쟁이 나고, 테러, 지진, 폭동, 분쟁이 일어난다 해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대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애기를 낳아야 정상이라고 말하지만,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아이를 낳아 예수의 족보에 든 섹스 스캔들도 성경은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족보를 보고, 세상의 조건을 내다보지만, 하나님은 은혜의 손길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만약 세상의 조건에 의해 구원이 결정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은혜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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