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

‘하나님과 동행’이 자녀인 우리 삶의 출발지점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4)

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
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

가정의 달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 혹은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아버지이신지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항암 치료 중인 기자의 글을 보았습니다. 먹고 싸고 자는 것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가장 그립다고 했습니다. 이 기자는 변비 때문에 고생했다고 했습니다. 먹고 싸고 자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기초입니다. 이 3가지가 막 태어난 아기의 미션입니다. ‘빨싸자!’ 빨고, 싸고, 자야합니다. 삶의 출발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빠진 게 뭘까? 오늘 본문에서 배웁시다.

본문에 아버지가 나오는데, 모든 아버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배우 김혜자 씨가 아프리카 봉사활동 중에 쓴 글에서 나온 것인데, 그냥 수사가 아니라 정말 그렇다고 느낀 경험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아버지가 어느 아들에게도 화내거나 강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식들에게 삶의 출발이라는 특별한 느낌입니다. 상담학과 교육학을 공부할 때 아버지와의 관계가 한 사람의 심리를 결정짓는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왜 어머니가 아니고 아버지일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얻습니다.

아버지가 여러 가지로 더 힘이 있기 때문이죠. 삶은 힘 있는 사람과 잘 지내야 잘 풀려나갑니다. 엄마가 내 마음의 고향이긴 하지만, 가족에게 더 큰 힘은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느낍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편안해하거나 불안해하고 담대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힘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자식들이 해달라는 대로 합니다.

작은아들이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자 나누어 주었습니다. 본문에 조용히 숨어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 유산을 주면서 큰아들에게도 그의 몫을 주었습니다. 11절에,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랬습니다. 공평도 하고요.

또 작은아들의 주장은 들어준 것입니다. 당시 사회의 유산 분배 방식은 이렇습니다.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유산을 좀 이른 시기에 나누어 줄 수 있고요. 그러나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재산에서 나오는 소득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상당히 합리적입니다. 유산을 나누어 주었다고는 해도 살아 있는 아버지는 그 유산을 지배합니다.

어쨌든 본문의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말을 들어주고, 큰아들도 억울함이 없도록 조치했습니다. 이 유산을 작은아들이 팔아 치우는 것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이미 주어진 유산을 통한 소득이 아버지 몫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팔아 치울 수 있는 권한이 아들에게 어느 정도 주어진 것이죠. 그 유산을 정말 팔아 치웠다는 것은 아버지의 지배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래도 이 아버지는 화내지 않습니다. 아들이 유산을 팔아넘길 때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 성경에는 말이 없습니다. 아들은 유산에 대한 최종적 권한을 사용했는데, 아버지는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상의 누구도 적절히 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걱정하면서 지켜보았을 겁니다. 오늘의 부자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아들이 자기 권한의 최대한을 사용할 때 아버지는 그냥 지켜봅니다. 화내거나 역공하지 않습니다.

이 허랑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재산에 관한 사건을 잊어버린 듯이 행동합니다. 아들을 반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특히 22~24절 말씀은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사랑은 시간과 돈이 들고, 결국은 그 시간과 돈을 상회합니다. 본문이 그걸 보여줍니다. 바로 거기서 아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인 누가복음 15장 22~24절은 잘못한 자식을 용서하는 아버지에 대한 온 세계 모든 문학을 대신할 만한 감동의 글입니다.

여기에는 죄의 개념이 없고, 용서의 개념도 없고, 새 생명만 있습니다. 원망도 없고, 응징도 없고, 오직 아들의 존재와 생명만 보입니다. 아들의 존재와 생명이 아버지의 마음을 가득 채워서, 그런 것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에게 용서받는 것은 쉬운 일일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심정이 아버지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기서 이미 봅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중요한 교훈입니다. 하나님만 아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예수님께서 교훈한 것이죠. 성경의 모든 본문이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이런 속마음이 있다는 것을 성육신한 예수님은 알려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너무나 중요한 정보입니다.

큰아들에게 이 아버지는 철없어 보였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철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넋이 나갔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란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느낌이 적지만,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느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면 아주 넋이 나가신다. 큰아들에게 그것은 이상하고 불쾌했습니다. “그놈 때문에 송아지를 잡으셨어! 어이가 없네!” 그래서 아버지에게 따지죠.

아버지는 따지는 큰아들에게도 화내지 않습니다. “동생이 돌아왔는데 네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줍니다. 31절입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너무나 적절한 말이고, 큰아들에게도 안도감을 줄 만한 말이었습니다. 송아지 한 마리 잡았다고 변하는 건 없습니다. 내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라는 말이 훨씬 더 중요한 말입니다.

큰아들은 이 말에 별로 감동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큰아들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비유한다고 해석합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덜 사랑하지 않지만, 큰아들은 영생의 잔치에서 배제될 위험에 놓여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을 환대한 아버지는, 큰아들의 어떤 문제에 대하여 그를 환대할 무슨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큰아들을 좋지 않은 사람으로 해석해 보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사용할 사랑의 전략도 가지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큰아들의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일도양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아버지의 말을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거든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나의 것이 모두 너의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동행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회개하여 되돌아오는 것은 물론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뭘 하겠습니까? 아버지와 동행해야죠. 큰아들은 이미 그것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래서 나의 것이 모두 너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큰아들의 독점권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소유적 독점권 이상의 심적 일치감이 아버지의 말에 들어 있습니다. ‘너는 나와 하나야!’ 아버지와의 동행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존재와 생명이 가장 중요하고, 바로 그 아들과 동행이 중요합니다. 아버지는 다른 어떤 것에도 큰 중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이 말씀을 하십니다. 

“너와 내가 같이 있다는 것. 그래서 ‘하나’라는 것. 그것이 중요해.”

살다가 동생처럼 잘못하고 실패할 수도 있고, 형처럼 잘 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는 실패와 성공에 관심을 두지 않고, 존재와 생명 그리고 동행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그래서 ‘빨싸자’ 말고, 우리 삶의 출발 요소는 동행이라는 거죠.

오늘 본문은 이상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근면한 큰아들은 제쳐두고, 허랑방탕한 작은아들이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런 이상함으로 가득합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16장 1~11절 말씀에도 이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의 재산을 헤프게 쓰다가 쫓겨난 청지기가 최후의 한 방으로 다시 주인의 재산을 빼돌려서 여러 사람에게 선심을 썼거든요. “안 그래도 괘씸했는데, 너 잘 걸렸다”하고 완전 박살을 내야 할 텐데, 오히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지혜롭다고 합니다. 마음 넓은 주인이죠. 바로 하나님의 표상입니다. 살자고 하면 인심을 얻고, 그런 준비를 해야지. 그렇게 이해합니다. 뜻밖이죠. 그리고 천국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준비를 해야 되겠느냐는 교훈을 이어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이야기의 광채는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 이야기를 할 때 단지 신비스럽게만 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땅을 따라서 단지 최고의 도덕성만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뭔가 문제가 있고 하자가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와서 통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한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천국이 허랑방탕한 자들의 영토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런 허랑방탕한 인간도 받아줍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기억할 때 우리의 것으로 남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이것이 삶의 진정한 출발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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