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익 목사(창성교회)

주님 위한 고결한 희생은 교회 회복의 원동력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함성익 목사(창성교회)
함성익 목사(창성교회)

평안북도 영변 출신의 박관준(朴寬俊) 장로님이 계십니다. 1937년 평양의 삼숭(三崇), 숭실전문·숭실중학·숭의여중이 신사불참배로 폐교위기에 놓였다는 기사를 읽은 뒤 신사참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일제와 합법적으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수차례 총독부를 방문하여 신사참배 강요를 포기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여의치 않자, 일본 중의원에 직접 청원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종교 법안이 심의되는 1939년 3월 24일 회의장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이다”라고 외치면서 준비되었던 건의서를 단상을 향하여 던졌습니다. 이 일로 32일간 경시청에 갇히게 됩니다. 귀국 후에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다 검속되어 6년간의 옥고 끝에 평양의 옥중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그가 가진 삶의 원칙은 ‘아생교회사(我生敎會死),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이었습니다 ‘내가 살면 교회는 죽고, 내가 죽으면 교회는 산다’라는 뜻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들은 신뢰도가 많이 추락되었습니다. 지난 1월 기윤실에서 발표한 교회 신뢰도에 대한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76%가 ‘교회에 대해서 신뢰하지 못하겠다’라고 답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교회가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우리는 순교자 기념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교회의 영광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드렸던 순교정신이 이제 다시금 깨어나야 할 시기입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추락한 이 시대에 우리는 ‘내가 죽을 때 교회가 산다’라는 순교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순교의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살길을 마련코자 다시금 그물질을 하는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교회의 맥박 소리는 희미해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이 부활 이후 교회를 다시금 일으키시려 하실 때 순교를 언급하셨다는 사실은 순교가 교회를 회복하는 힘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순교정신을 불어넣어주심으로 미약해진 교회의 심장을 다시금 뛰게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갖추어야 할 순교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1. 순교는 나의 원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라고 말씀을 합니다.(18절) ‘젊어서’라는 말은 베드로의 젊을 때를 말하는 것임과 동시에 신앙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곧 이전에는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지 못할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순교는 자기 본위로 지내왔던 습성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대로 살던 삶의 자세를 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있습니다. 카타콤은 ‘무덤’이란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네로의 박해를 피해서 은신하게 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네로황제 때부터 콘스탄티누스 때까지 약 250년간을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에서 생활했던 것입니다. 화려한 로마도시의 문화를 뒤로 한 채 어두컴컴한 지하공간 속에서 생애를 보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육체의 본성을 좇았다면 죽는 것이 무서워 화려한 도시의 삶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옛사람을 지하무덤에 묻어 버린 채 여생을 카타콤에서 지내기로 한 것입니다. 

순교는 믿음을 버리고 편안히 살고 싶어하는 육체의 악한 본성을 십자가의 망치로 부서뜨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원함을 부숴뜨리는 사람만이 순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남기신 다섯가지의 기도 가운데 첫 번째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왜 이러한 기도를 드리시게 되었습니까? 죽음이 두려워서 의를 버리고,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죽음의 권세 앞에 굴복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도로 이겨내신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죽음과 핍박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의 신앙이 나약해지거나 느슨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 자기의 안일을 챙기고자 하는 육체의 원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고 싶어 하는 자기의 원함을 철저하게 내려놓는 것입니다.

2. 순교는 주님의 원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본문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선택하는 권리가 박탈되는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녔다면 이후로는 자신의 원함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뜻에 따라가게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서 죽음의 현장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임을 1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클레멘트는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서 순교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터툴리안은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남이 네게 띠 띠우고’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남이 매어준 띠를 띠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는 원치 아니했는데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하여 죽게 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절에 보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능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음을 믿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부르심을 기꺼이 수용한 것입니다. 순교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겠지만,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뜻을 따라서 기꺼이 죽음의 자리에까지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전남 영광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의 피를 간직하고 있는 염산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 앞에는 77인의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 총회역사위원회가 한국기독교 순교사적지 1호로 지정하였습니다. 1950년에 염산교회에 김방호 목사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 목회를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6,25가 일어난 당시에도 교인들의 가정을 돌아보면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며 신앙으로 모든 성도들을 붙잡아 주는 일에 열심을 내셨던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인민군들에 의해서 그의 가족 8명이 죽임을 당하고, 그 교회 성도들은 그 교회 앞에 있는 바다에 돌이 묶인 새끼줄에 묶여서 줄줄이 수장을 당하게 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새끼줄에 포박된 채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가며 바다에 빠지는 성도들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라는 찬송을 부르며 나아갔습니다. 죽음 후에 주님을 뵙게 될 것을 믿으며 두려움을 내려놓고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순교자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고결한 희생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썩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일임을, 그들의 죽음이 감히 좇아갈 수 없었던 주님의 쓴 잔을 마실 수 있는 영광의 잔이었음을 믿기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순교는 주님의 뜻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고 주님의 제단 앞에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산제사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양 주기철 목사님께서 순교를 앞두신 어느 날 단상에서 5가지의 기도제목을 놓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네 번째 기도제목은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을 지키고, 여자가 되어서는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듯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은 주님을 위하여 믿음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신앙의 정절이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을 다시금 살아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일사각오로 주님을 따르는 교회들을 통해서 다시금 이 땅에 교회의 회복 곧 부흥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이 시대에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같이 그리고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과 베드로와 같이 순교정신으로 무장하여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 우리 모두 쓰임 받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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