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

새 마음으로 온 세상 두루 가르치고 복음 전합시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막 6:6)

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
안영혁 목사(예본교회·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

믿음도, 현실도 신자의 삶에서 당연한 고려대상입니다. 4차 산업혁명도, 인공지능도, 클라우드 산업과 블록체인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말하자면 ‘초연결 인간화 신앙공동체’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 출발의 의미는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께 있습니다.

설교 제목을 ‘진격의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초연결 인간화 신앙공동체로 출발하는데, 그 진격의 힘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본문 6절을 주목합니다.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이것이 기독교 교회 변화의 모델입니다. 두루 다니신다는 말을 현대적으로 확장하면 초연결이지요. 초연결은 최신의 변화요, 오늘날 버전의 진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룩한 진격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진격을 담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에 가능하고 실효성 있는 초연결을 실제로 선택해 실행했습니다.

초연결이라는 현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초연결을 통하여 사람들이 더욱 사람다워지고, 복음이 확실히 자리잡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표현한 인간화와 신앙공동체의 정착이죠. 우리는 초연결과 복음, 이 두 가치를 결합시켜야 하는 시대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 수 있는 곳에는 다 가시려고 했고, 지금은 고향 나사렛에 와 계십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실망이 6절 상반절에 표현되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께서는 그 실망 때문에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또 한 번 연결과 진격에로 나가십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그것은 우리 시대 초연결 인간화 신앙공동체의 모델이 될 만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것만 많은 곳이 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늘 거룩한 영적 진격을 멈추어야만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마치 외국인처럼 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런 실망으로 물러서지는 말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우리가 더 넓은 세상에, 더 두루 나가자! 예수님은 초연결 인간화 신앙공동체를 가리키고 계시지만, 신자의 그 길을 가로막는 요소는 많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진격합니다. 우리도 진격합니다.

본문 말씀 앞부분에는 계속하여 진격하는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 진격이 치열하고 아름답고 또 쉴 새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지나간 후에도 예수님의 진격은 계속입니다. 부활의 그때까지입니다. 일단 갈릴리 사역이 나오는 마가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들 마음속으로 어떻게 들어가셨는지, 단락이 바뀔 때마다 예수님의 인상은 새로워지고, 사역의 분위기도 일신됩니다. 계속 그렇습니다. 지역이 바뀌고, 사람이 새로워지고, 전에 없던 일이 일어나고, 장애가 오히려 새로운 시작과 가능성이 됩니다. 진격하십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장 시작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치 창세기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 시작처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창조의 웅장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인 문제들에 대하여 예수께서 복음으로 오셔서 새로 시작한다는 말씀이죠.

그래서 복음이란, ‘창조 이래 이스라엘을 거쳐서 인간들이 풀지 못한 문제들에 대한 답이다’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가복음 1장 1절의 아우라입니다.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진격이요, 하나님나라의 진격이요, 복음의 진격입니다. 그런 다음 1장 9절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데, 뭔가 시작을 할 거라는 느낌이 아직 사라지기도 전에 1장 15절에 예수님 복음의 총괄이 선포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나라 주제의 등장입니다. 이것도 진격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기세는 계속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잘 안 나왔지만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3절입니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마태복음 말씀에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갈릴리 호숫가로 이사하신 겁니다. 완전히 갈릴리 호수 교통 요지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만, 동서남북으로 왕래하기 더 좋은 해변으로 이사한 것입니다. 혹은 호수를 따라서 움직이고, 때로는 육로로 이동하였습니다. 당장 본문 바로 앞 5장에서는 갈릴리 호수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육로를 따라 고향에 가셨습니다.

복음서는 내내 이 예수님의 진격으로 긴장감이 팽팽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또 한 번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진격의 활동을 위해 떠나온 고향 나사렛에 다시 왔습니다. 제자들이 동행한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그 느낌이 특별합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존재를 통해 고향 사람들에게 뭔가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제 섭리대로 이렇게 되었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당신들도 깨달으라. 이것도 진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대를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착각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뭔가 예측을 잘못하신 가장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나사렛사람들처럼 물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의 저 능력과 저 지혜는 대체 뭐지?’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예수께는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 누이들이 우리 옆에 있고, 그 형제들도 그렇지 않으냐? 그렇게 제멋대로 생각한 채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실망스러웠습니다. 6절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성경에 14번 ‘이상히’라는 말이 나옵니다. 전부 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상히 여기셨다”는 말도 그 뜻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심하고 곡해하고 배척하여 하나님의 능력도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저 예수가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우리가 알던 그 목수가 아니냐? 인정할 수 없어! 그가 하나님을 진지하게 말하고, 또 그의 인품이 고상한 것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닮았지만, 목수 예수가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는 거야!’ 그렇게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지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간결하게 원인을 따라 생각하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나사렛 사람들이 이상한데, 믿음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사실을 되짚어야 합니다. ‘내가 이상한데, 내 믿음에 문제가 생긴 거야.’ 예수님은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하다고 하신 그 예수님 말씀을 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하시고 어떻게 사시고, 또 보여주셨나?’ 예수님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행하시고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삶을 결국은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시고, 십자가 그 고난의 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섭리가 통하지 않고 믿음이 통하지 않는 나사렛의 이상함, 이해할 수 없음, 섭섭함, 모호함, 그 모든 것에 대한 예수님의 실제적 답이 무엇입니까?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정적 진격입니다. ‘이상하게 이 일이 실패처럼 보인다는 거야? 그러면 또 진격이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최근에 저와 매우 가까운 어떤 분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크게 성공할 줄 알았는데!” 제가 그분에게는 차마 답하지 못했지만, 제 답은 이것입니다. “주님, 이제 우리가 온갖 일을 벌여서 두루 다니며 가르쳐야겠습니다. 이 통찰과 결심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역사가 흐를수록 사람들은 새로 부딪히는 일에 환호하거나 당혹해하면서, 그 결과 하나님을 멀리하려 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견고한 태도로 그렇게 느끼고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허약해지다니 이상한 일이다. 이제 우리가 새 마음으로 온 세상을 두루 가르치고 믿음을 전해야겠다!”

여러분, “내가 작은 예수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격을 생각하면 아무도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자격이 없다는 허약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처럼 진격해야 합니다. ‘내가 작은 예수다, 나는 부지런히 모든 일에 나간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약간은 이상한 말로 조합된 교회의 사역이 바로 이것입니다. ‘초연결 인간화 신앙공동체, ◯◯교회!’ 저는 이제 유튜브 영상에도, 다시 만들 명함에도 이 말을 새기려고 합니다. 순결하게 기다리고, 어려움이 와 있다 해도 인내할 뚝심이 철철 넘치고, 다시 진격하는 그런 교회로 서야겠습니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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