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수 목사(원주중앙교회)

물러서지 않으며 전심으로 하나님 찾는 성도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막 7:29)

오성수 목사(원주중앙교회)
오성수 목사(원주중앙교회)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떠나 두로 지방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두로는 이스라엘 북방의 해변에 위치한 이방지역으로, 무역의 중심지여서 경제적으로는 아주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두로는 ‘아스다롯’이란 여신을 숭상하던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온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 어린 딸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마가는 그 여자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녀가 상당히 지성을 갖춘 교육받은 여인임을 가리킵니다. 헬라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을 법한 그녀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께 자기 딸을 고쳐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거절하셨습니다.

참 특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움을 구하러 나온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왜 이렇듯 단호히 거절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인종차별을 하신 것일까요? 저는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유대교 회당장인 야이로가 어린 딸을 위하여 간구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흔쾌히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방 여인의 간구에는 분명하게 거절하십니다. 또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함으로서 이방 여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인 회당장이 딸아이를 구해달라고 할 때는 흔쾌히 따라나섰던 주님께서 이방 여인의 간구는 거절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인종차별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자비하신 예수님의 말이라고 도저히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인의 형편을 뻔히 아시는 주님께서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그 여인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당시 제자들과 모든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인종차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무시를 받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 이것은 정말이지 참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이방인이라고 하지만, 이렇듯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시키다니요.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당해 본 적이 있는지요? 가난하거나 배운 것이 없다고 무시를 당하고, 유색인이나 여자라고 괄시를 받아 보셨습니까? 이런 상황을 만나면 정말이지 견디기 어렵습니다. 설사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님마저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게 실망했을 법도 합니다. 그 자리를 박차고 욕이라도 할 법합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했거늘 메시아라는 분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와 같은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주여 옳소이다마는” 이것은 자아가 깨어지는 소리입니다. “저는 이방 여인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받기에 합당치 못한 존재입니다. 저와 우리 민족은 대대로 아스다롯을 섬겼던 개 같은 여인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러분, 자아가 깨어지고서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아십니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오면서 자존심으로 인해 실족하고 넘어집니다. 자녀들이 진학시험에 떨어지면 자존심이 상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사업하다 부도가 나면 부끄러워서 못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자식 자랑하러 나오는 곳도 아니요, 자기 사업을 자랑하기 위해 나오는 곳도 아닙니다. ‘나 좀 알아주시오’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부끄럽다고 교회를 등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요, 날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더럽고 추한 내 죄가 용서함을 받았고,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고백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곳은 결코 자존심을 내세우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수로보니게 족속의 이방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인종차별과 같은 멸시를 당했지만, 은혜받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할렐루야! 만약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의 자존심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면 딸 아이는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람 장군 나아만은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나병이라는 치명적인 아픔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다가 아주 신분에 걸맞지 않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먼 길을 왔건만, 엘리사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종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들어가 버렸습니다. 만약 나아만 장군이 계속 자존심을 내세우며 그냥 돌아갔다면 그의 나병은 치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아만이 자신의 계급장을 떼고 겸손히 요단강에 들어갔을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문제 해결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부자 청년은 물질로 인하여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때로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사 먼저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때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믿음을 보일 때 주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딸 아이 문제로, 남편 문제로, 건강 문제로, 재정 문제로 고민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삶의 문제를 가져오신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믿음을 보이십시오.

주위의 제자들이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마 15:23)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려도, 주님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여인의 큰 믿음이었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이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제자들과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느냐고 원망하십니까? 왜 우리의 기도에 주님은 묵묵부답이냐고 불평하십니까? 주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수로보니게 여인을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그녀는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부르짖기를 계속했습니다. 이방 여인이라 인종차별을 해도 그것으로 인해 은혜받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틀어 예수와의 논쟁에서 이긴 유일한 인물이 바로 이름도 없는 이방 여인, 곧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딸을 위해 간구한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게 어떻게 반응하느냐?”

이방 여인인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은 인종차별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주님께 보이므로 삶의 문제를 해결 받았거늘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요?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부스러기 은혜가 아니라 배불리 먹고 남는 넉넉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케 하셨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가정을 능히 새롭게 세워주시고, 우리 교회를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시켜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싶어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성경은 온통 우리를 향한 초대로 가득합니다. 문제는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이 정말로 믿음으로 나아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두 번 기도해보다가 포기해 버리는 그런 믿음이 아닌 절대 물러서지 않는 믿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성도를 원하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으로부터 “합격!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는 칭찬과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